풍성한 녹음과도 같은! 

그 좋던 옛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그토록 명랑하던 나는 어디로 갔나. 

갈바람에 우수수 나뭇잎을 빼앗긴 나목처럼 밤새 추웠다. 전기 장판으로 뜨겁게 달군 바닥은 따뜻했으나 방안 공기는 코끝이 시리도록 냉랭했다. 잠을 자면서 들여 마신 차가운 공기는 가슴속에서도 허한 바람이 되었다. 수면 중의 나는 천애 고아인 듯, 세상에서 버려진 듯 슬프고도 고독했다.  자는건지 마는건지 하였으나 간간이 나의 코고는 소리에 스스로 흠칫 놀랐던 것을 보면 분명 불면의 밤은 아니었다. 어젯밤은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의 초입에 서 있었다.

 서늘한 아침 공기와 찬란한 태양 그리고 파랗고 높은 하늘은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하모니이다. 오늘까지만 가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늦단풍이 그리워졌다. 지금 보지않으면 영영 못볼것 같은 망상은 무슨 연유일까. 근래 몇몇 크고 작은 병원 출입과 신종 바이러스의 위협이 나를 자신없게 만들었다. 내년에도 내게 가을이 올까? 

인생의 시각으로 치면 저녁6시, 계절로는 가을의 어디쯤에서 서성이는 나. 푸른빛의 끝자락에서 이대로 발을 땅에 심고 싶은 욕망이 일렁임을 고백하고 싶다. 나의 부끄러움에 단 한사람 만이라도 고개를 끄덕여 준다면야 나는 구차하지 않을 것 같다.

단풍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마운트 윌슨(Mt Wilson)으로 떠났다. 도심 보다는 일찍 잎을 떨구는 그곳에 가까스로 나를 맞이해줄 나뭇잎이 붙어 있어야 할텐데 조바심을 앞세우고 바람과 하늘을 가르며 도로를 달렸다. 다행히도 도로의 나무들은 정식 코스가 나오기 전의 에피타이져 인양 드문드문 집단을 이룬 단풍의 현란함으로 맛보기를 보였다. 순간 보였다 슬쩍 사라지는 그것은 하늘이 허락한 마술사의 손놀림을 보는 것 같았다. 한순간의 색채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나의 눈은 긴장을 멈출 수 없었고 벌어진 입은 짙은 탄성을 토해냈다. 사철 나무의 푸르름 사이로 빛나는 보석처럼 박힌 오색창연한 빛깔들은 매혹적이다 못해 관능적이었다. 진초록의 젊음을 버리고 저토록 아름다운 잎들을 미련없이 떨구어 버리는 나무에게서 거룩함을 보았다. 나뭇잎 만큼이나 많은 오욕칠정을 한점 남김없이 떨쳐 버리고 흙으로 돌아감에 일말의 댓가나 감사함도 바라지 않는 무상무념의 우직함에 나도 그러하기를 소망해본다. 

 여러 차례를 다녀왔음에도 이토록 넓은 대지 위의 어느 곳에 단풍 산이 있다는 말인가. 공간능력이 둔한 내가 불안해 할때쯤이면 위안처럼 이정표가 보인다. 끝간데 없는 도로의 한 지점에서 이정표를 따라 우회를 해서 산이라 불리우는 평지를 달렸다. 마침내 아찔한 기역자로 꺾인 언덕, 명색이 산허리를 돌때는 긴장감이든다. 하늘을 찌르는 고목들로 빛이 차단된 조붓한 산길을 뚫고 달리자 타잔이 타고 놀았을 법한 밧줄같은 나무줄기가 늘어진 어둑신한 산에 도착했다. 하느님의 명령으로 분리된 세상인양 고풍스러운 그곳은 단풍의 색깔도 다양했다. 빨강 주황 노랑 자주 진분홍 연분홍 녹슨색 그리고 간간이 늘푸른 사철나무도 미운 오리새끼처럼 끼어있다. 온통 물든 나무의 한구석에는 끈질기게 초록의 한자락을 붙잡고 있는 가련한 나무도 있었다. 아직도 청춘을 버리지 못한 애절함이랄까.

 사진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빨강과 오렌지로 잎을 물들인 나무 밑에 섰다. 늙으면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시쳇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입고있는 인생의 계절 옷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감추려는 카멜레온의 속성일까. 나도 슬슬 빨간색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목이 되기 직전의 화려함은 공수래 공수거의 위안이다. 알고보면 인과의 진리는 보편적이다. 사진 속의 나는 단풍나무 아래서 숱많은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웃고 있었다. 뒷배경을 내어준 갈잎들 사이로 머리카락이 제각각 흩날리고 있는 것을 보니 가을바람도 함께 찍힌 모양이다.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여 왔던 곳으로 가는 바람이어라. 살짝 쳐든 얼굴을 받치고 있는 나의 모가지는 가을을 타고 있었다.

오랠수록 좋다는 옛 사람들이 이제 이런 저런 사정으로 사라지거나 멀어졌다.

나뭇잎처럼.

무슨 까닭일까 누구의 잘못일까….

혀로 베인 상처 때문에, 레이저 같은 눈빛 때문에, 그냥 때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가까스로 붙어있는 나뭇잎은 사실일까 그림일까?

옛님들과 나.

불변의 진리는 영원한것은 없다 하니

가끔은 옛날 사진을 보듯 그때가 좋았네 그리워 하며

자연의 이치에 원망이나 죄책감 일랑은 느끼지 않았으면 하오.

우리는 자연스레 자연이 되어갈 뿐….

가을 산을 뒤로하고 낙조의 배웅을 받으며 힘차게 액셀을 밟았다.

이항아/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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