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내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 이런 삶이 영원히 지속될까요? 

주님은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고 질문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에게 잘못된 생각은 자기의 재산전부가 자기 소유라는 것부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열심히 일을 해서 부유해진 사람에게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12,15)는 말씀입니다. 모든 물질의 축복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재화를 모두 내어 놓으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 성실함 또한 하느님의 축복을 드러내는데, 이는 용서의 개념과 동일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용서의 기초를 제시하십니다. 

이는 영화 ‘밀양’(전도연 주연), ‘죄와 벌’(이정재, 차태현 주연)의 메시지와 동일한데, 바로 하느님께서 이 지상에서 이루어진 용서에 대해서 하늘에서 문제 삼지 않겠다는 영화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살인범은 교도소로 자신을 찾아간 피해자(전도연)에게 말합니다. 자신은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피해자(전도연)는 분노합니다. 어떻게 가해자가 피해자인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하느님이 용서할 수 있단 말이냐고...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확실히 반대합니다. 곧 인간들의 용서가 하느님의 용서를 통하게 하는데,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용서의 축복을 막아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용서축복은 잘못한 가해자가 피해를 받은 사람에게 용서를 빌면서 이루어지는 은혜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청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용서를 어떻게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다시 시작의 주제, 재화문제로 돌아갑니다. 성실한 사람이 모은 재화는 자신의 소유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은 그 재화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는 말씀입니다. 이는 용서의 복음과 유사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부유하다는 것은 자신의 재화를 이웃과 나누는 애덕행위입니다. 자신이 나눌 수 있는 만큼을 가난하고 어려운 곳에 봉헌하는 사랑의 나눔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과 통합니다. 작은 일에 성실한 자는 큰일에서도 그 모습이 드러납니다. 기회 앞에서 절박했던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존재합니다. 크고 작은 기회는 또 다른 기회를 창조합니다. 재화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사랑이 움직이는 데로 하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 톤즈의 이태석 신부, 그들은 곁에서 함께 살던 이웃들을 친구라 부르며 살았습니다.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울지마 톤즈! 친구라 불러주세요! 이들은 주님의 친구로 통하며 살았습니다. 어떤 인간적 권위와 위세 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친구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못 잊어 하고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사람을 종으로 부르지 않고 벗으로 부르신 예수의 삶을 증거하며 노예를 해방하였습니다. 김 추기경은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사랑의 공감을 살아간 이 시대의 어른친구셨지요.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늘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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