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 대하여 쓸 때마다 매번은 아니지만 왜 그러느냐를 짧게 설명했었다. 좀 다른 표현으로 또 쓴다. 밖에 나와 살아도 고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크게 지배하는 현실, 또 우리가 나와 잘 배운 게 있다면  거기 형제자매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나대로의 의무감 또는 강박감이 그 이유다.

오늘은 누구나 아는 대로 실타래처럼 엉킨 한국 사회의 이야기다. 누가 그걸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당선된지 3개월도 안 된 대통령을 욕하고 탄핵 운운하는 국민이 많다면 말이다. 이 실타래를 푸는 길은 무엇인가? 서둘지 않고 차근차근 갈피를 찾아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우리 형제자매들은 그런 장기적인 해법을 싫어한다. 

거창한 폭로나 시원한 사이다 발언으로 온 나라가 들끓으나 그래가지고는 상황은 갈수록 더 나빠진다. 

대한민국이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며 먼저 어디에서 손을 댈 것인가를 묻는다면 대답은 저마다 다르겠는데 나는

국민통합을 들겠다. 국민 서로간 합심할 수 있어야만 지금의 문제들이 시간을 두고 실타래 풀리도록 해결될 것이고 우리의 염원인 통일도 언젠가 이뤄질 것이다.

“대통령 못해 먹겠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억울한데  남한에서마저 좌우와 지역감정을 따라 진영별로 4분5열 되어 있어 머리 달린 사람은 모두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생각을  달리 하니 누가 통치자가 되든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겠나.

최근 윤석열 정부는 대선 공약대로 국민통합위원회를 창설했다. 물론 그건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국민통합에 대한 국민적 인식(National awareness)은 적어도 정치인과 공직자와 지식인 간에 일찍부터 자리 잡았고  이를 위한 비슷한 기구들이 역대 정권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건 말뿐이고 기구는 겉치레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위한 자리 안배에나 쓰여온 게 사실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국민통합인가를 제대로 알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심층연구를 거쳐 고안된 구체적 방법과 그에 대한 국민적 합의 속에 실천해 가도 잘 될까 말까인데,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저 가끔 들리는 말은 국민통합을 빌미로 전 정권에서 범법으로 잘 해먹어 감방에 간 실세 권력자, 정치인, 재벌 누구누구를 사면 또는 무죄로 해줄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닌가.

콩가루 집안

세상에 죄 없는 자를 감옥에 보냈다면 이해가 안 간다. 방대한 엘리트 집단인 사법부는 뭘 했다는 건가? 또 법을 어긴 사람은 받은 형을 제대로 살아야 하는데 권력자가 자기 권한이라며 사면하기를 밥 먹듯 한다면 법의 형평성은 어떻게 되나? 이런 사실들은 국민통합커녕 오히려 해친다. 특히 특혜자가 먹기 살기 위하여 죄를 저지른 서민이 아니고 높은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위에서 국민통합이란 간단한 개념이 아니고 그를 위한 실천은 더 어렵다고 지적했다. 아는 것과 실천은 다르나 잘 알지도 못하고 국민통합을 외친다면 그건 정치적 슬로건이나 헛소리로 끝날 수 밖에 없다.

국민통합에 대한 다른 말을 찾는다면 결속력(Solidarity) 또는 응집력(Cohesiveness)이다. 모래알은 응집력이 전혀 없다. 이에 빗대어 콩가루 집안이란 말도 생겨났다. 그러나 국민통합에 대한 내가 특별히 들고 싶은 조건은 일체감이다. 너와 내가 따로 없고 하나(Oneness)라는 정서다.

풍랑 속 바다에 갇힌 배를 탄 사람끼리 느끼는 절박한 심정이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통합의 잣대는 구성원 간에 심리적으로 존재하는 거리감이며 이에 대한 학술 개념으로 사회심리학자들이 일찍이 연구하고 사용한 ‘사회적 거리감(Social distance)’이란 용어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7월27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민통합위원회 출범식에서 김한길 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 촬영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7월27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민통합위원회 출범식에서 김한길 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파

결국 국민통합을 제고하는 길은 이 거리감을 좁히는 것이다. 거의 3년 전부터 전 세계로 퍼진 코비드-19 팬데믹을 막기 위하여 실시된 사람간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의 어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이나 재미있는 점은 이 두 가지는 전혀 상반된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전자는 육체적 거리(Physical distance)로서 넓을수록 좋고, 후자인 심리적 거리(Psychological distancing)는 좁을수록 좋다.

코비드-19 기간동안 방역을 위하여 전자인 사회적 거리 두기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철저히 배우고 실천하여 왔으나 건전한 사회를 위해 구성원 간 심리적 거리 좁히기를 걱정하는 사람은 어제나 오늘 드물어 보인다.

이번에 창설된 국민통합위원회가 얼마만한 예산을 가지고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해갈 것인가는 여기 앉아서 알 수 없다. 그러나 과거 정부의 대부분 행정위원회 기능이 그랬듯이 친정부 학자, 전문인, 이른바 원로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알량한 의견이나 듣고 밥 먹고 끝나는 행사들로는 어림도 없다.

먼저 여러 분야 양심 있고 실력 있는 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인문사회과학적이며 정책지향적(Policy-oriented research) 심층연구가 절실하다.  국민통합은 미시적이며 행태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어느 한 분야 전문가의 전문성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왜 한국인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하는가에 대한 연구를 정치학자, 역사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어느 한 전문가에 맡겨 될까. 350여개의 한국의 대학과 교수들이 나서야 한다. 오늘 한국의 대학 교수들은 배고프지 않으며 연구 자금도 쉽게 받을 수 있다. 모두 무엇들을 하는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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