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어느 부모에게나 소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애지 중지 키우는 아들이 패악한 경우, 탈무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엄격한 체벌 기준을 세워 두고 있다. 이는 현자들 사이에 율법의 원리와 적용 방식에 대해 상당한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그 안에는 율법에 대한 신의 의도와 사랑하는 아들의 죄라는 미묘한 관계 속에 어떤 정의를 실현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담겼다. 문제의 율법은 신명기에 담긴 다음의 구절들이다. 

돈을 탕진하는 방탕한 아들
돈을 탕진하는 방탕한 아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신 21: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신 21: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신 21: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신명기21:18-21)”

탕진한 아들의 비참함
탕진한 아들의 비참함

1. 랍비들의 다른 의견

랍비 R. 시몬, 요하이는 “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결코 없었고, 또한 앞으로도 존재 하지 않는다” 라는 확연한 주장을 펼쳤다. 그가 이렇게 보는 것은, 법은 상세한 해석을 요구하고, 그에 대한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이 율법은 법적 행동을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안의 심각성을 보여 줘서 궁극적으로, 아들이 행실을 고치게 하기 위한, 실제이기보다 상징적 이론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탈무드적 해석은 이런 일이 일어 날 때 해석을 불가피 하지 않도록 상당히 제한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산헤드린은 이런 경우에 대해,

아들이 3개월 이내라는 교정 기간이 충족 돼야하고, 부모에게서 돈을 훔쳐야하고, 반드시 어느 정량의 고기와 고급 와인을 자기 부모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한꺼번에 먹고 마셔야 한다(산헤드린68b-71a) 는 규정을 두고 있다. 사실 이러한 법령은 세워져 있긴 하지만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불가능한 조건들이 오히려 상징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랍비들은 평가 한다. 

돌아온 탕자
돌아온 탕자

반면, R.요세 같은 랍비는 “ 토라가 못돼먹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훔치고 탕진한 경우 차라리 자신들과 세상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미래적 운명을 예시한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는 그가 한 일 보다 앞으로 그가 될 미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고 이로인해 이런 범죄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랍비 요세와 요나이의 견해 차이는 토라의 정의 구현에 있어 체벌이 곧 억제라는 것에 대한 이해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칸트와 벤담의 견해

계몽주의 시대에, 도덕의 원리에 대해서 임마누엘 칸트와 제레미 벤담의 논쟁은 잘 알려진 사례이다. 칸트가 ‘도덕은 의무’라고 본 반면, 벤담은 ‘결과’라고 간주했다. 칸트는 정의는 인과응보이고 잘못한 것이 있다면 잘못을 범한 사람이 벌을 받고 사회에 도덕적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벤담은 사회에 결과적으로 최선이 된다면 그 행동은 정의가 된다는 공리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런 면에서 정의는 과거이기 보다 미래적이고 결과적으로 범죄가 줄어든다면,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견해 이다. 이 두견해는 현실에서 다른 양상으로 나타 났는데, 벤담은 결과적으로 전체에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면 체벌은 면제될 수 있다고 본 반면, 칸트는 체벌이 가해 지지 않은 범법은 정의가 구현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요하이와 요세가 정의에 대해 경고적 상징성과 인과 응보로 견해가 나뉜 것같은 맥락이다. 성경은 패역하고 완악한 인물로 아브라함의 첫 아들 이스마엘을 등장 시킨다. 

쫒겨나는 하갈과 이스마엘
쫒겨나는 하갈과 이스마엘

3. 패역하고 완악한 아들

성경에, 사라는 90의 늦은 나이에 이삭을 낳았다. 그때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10대의 장남 이스마엘이 있었다. 사라가 어느날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는 것을 보았다고 토라가 기록하는데, 랍비들은 이 ‘조롱’이란 단어를 ‘ 중대 범죄’로 보았고 결과적으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뜨거운 광야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물이 떨어지자 아들을 숲가에 둔 하갈은 하늘을 향해 “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다”고  외쳤고 성경은 이들의 간절한 외침을 들은 천사가 나타나 ‘ 거대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을 축복을 약속하며, 샘터로부터 물을 얻고 소생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몬 요하이는 이런 하나님을 ‘현재에 의를 행하는 분’이라고 표현했다. 같은 맥락으로 탈무드는 ‘각 사람들은 그 때의  행동으로 판단을 받고, 하나님은 그 소년의 소리를 현재 있는 그 곳에서 듣는다(로쉬하샤나16b)’ 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야로 쫒겨난 하갈과 이스마엘
광야로 쫒겨난 하갈과 이스마엘

이스마엘은 성경의 첫번 째 패역하고 완악한 아들이고, 성경이 말하듯 ‘후에 거친 나귀가 될 것’이라는 미래적 판단으로 아버지와 계모(사라)로 부터 거절을 당했다. 미드라쉬는 이에 대해, 요세의 견해 보다는 시몬 요하이의 편을 들었다. 그것은 신의 정의는 미래의 범죄를 미리 예방 하려는데 중점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미래에 어찌 될 것으로 심판하지 않는다. 신은 현재의 그들을 판단 하실 뿐이다.

탈무드는 정의의 원리에는  ‘인간의 자유’가 그 저변에 있다고 가르친다. 청소년의 비행이 나중에 반드시 살인자로 자라갈 것이라는 확실성을 예견할 수 없듯이 인간에겐 자유가 있고, 패악하고 완악한 아들이라던, 이스마엘도 나중에 회개한 것을 탈무드(Bava Batra 16b)는 상기시키고 있다. 탈무드의 궁극적인 원리는 미래를 예단한 체벌과 심판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법이 없으면 사회가 혼동에 빠지지만 담화가 없으면, 현실에서 일어나는 개인과 가족과 공동체의 삶의 이야기가 부재하게된다. 

임마누엘 칸트
임마누엘 칸트

4. 탕자 이야기

이스마엘 이야기에 이어, 신약에 등장하는 탕자는 전형적인 패역하고 완악한 아들일 것이다. 부자 아버지의 돈을 갖고 나가 탐닉한 삶으로 모두 탕진하고, 돼지나 먹는 주염열매를 먹으며 겨우 생존하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 종으로라도 살아야 겠다고 돌아 왔다. 그 때 아버지는 먼발치서 기다리던 아들을 보고 맨발로 뛰어나와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그를 맞았다.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화려한 옷을 입히며 아들의 지위를 서슴없이 인정해 주고 잔치를 베풀어 기쁨을 나눴다. 예수는 과거의 잘못에 체벌 보다는 돌아온 것 자체를 귀하게(의로)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천국의 모습으로 가르쳤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R. 시몬 요하이는  “처음부터 패역하고 완악한 아들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체벌 보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자체를 정의로 간주하는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용서가  정의의 더 근본적인 성경적 가치임을 발견하게 한다.   

영국의 공리주의 학자 -제러미 벤담
영국의 공리주의 학자 -제러미 벤담

탈무드는 과거의 잘못에 얽매여 허덕이는 많은 못난 아들들에게, 오히려 미래를 향한 위로와 소망의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토라의 ‘정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 (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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