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산 / 하얼빈

몇일 전 8.15 광복절을 지났다. 1945년 한국이 일본의 강점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한다. 한국과 일본은 악연이다. 지난 2천년 역사에서 한국이 이익 본 것은 거의 없다. 대부분 퍼 주기만 하다가, 칼과 총을 앞세운 그들의 침략 야욕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 주 영화 ‘한산’을 봤다. 주인공 이순신 역할을 한 배우는 전작 ‘명랑’ 주인공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였다. 영화내내 꼿꼿이 서서, 힘준 눈으로 관객을 바라보다가, 마지막에 화살 한 발로 적장을 쓰러뜨림으로 승리의 쾌감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톰 크루즈의 영화 탑건 2가 미국 국뽕이라면, 이 영화는 한국의 그것이었다. 

영화 보던 때를 즈음하여, 새로 나온 김훈의 책 ‘하얼빈’도 읽었다. 1909년,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를 하얼빈 기차역에서 저격하여 사망케 했던 안중근에 대한 소설이다. 기자 출신인 작가는 수집가능한 고증을 참고하여, 작가 특유의 언어와 상상력을 보태서 작품을 썼다. 나무위키는 안중근을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 운동가이자, 군인이며, 독립운동가, 평화적 아시아주의자’라고 소개한다. 동시에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는데, 암울했던 시대는 그를 평화의 자리에서 들어내어 살신성인의 자리로 떠밀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부는 프랑스 출신의 신부들이라, 안중근의 거사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조선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이 사건을 “미개한 사회의 원주민들이 문명개화로 이끄는 선진의 노력을 억압으로 느끼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례의 하나”로 봤다. 그래서 안중근의 신자 자격을 박탈함으로, 일본제국 하에서의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키려고 애썼다. 그런 입장은 ‘강한 자’였던 조국 프랑스의 것이기도 했다. 

안중근의 지위가 회복된 것은 1993년 김수환 추기경에 의해서다. “일제 치하의 당시 한국 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여러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연대적인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2000년에는 대희년을 맞아서 ‘쇄신과 화해’를 외치며, ‘한국교회가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라고도 밝혔다.

2. 케언즈 / Abhoriginal

케언즈 시내 중심에 있는 아트갤러리에서는 특별전시회가 진행중이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호주 원주민 예술가의 작품을 걸었다. 주제는, ‘Faceless Transforming Identity’. 전시된 모든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의 얼굴은 가려져 있다. 마스크로, 돈으로, 동물 모양으로.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비인격적인 존재인가? 물질인가? 짐승인가? 서방과 일본이 제국주의로 무장하여 식민지 개척에 힘쓸 때, 그들은 원주민을 그렇게 봤다. 돈으로, 물질로, 짐승으로.

호주를 예로 든다. 약 5만년 전부터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섬에서 살던 사람들이 호주 땅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오기전 이미 땅과 자연은 있었기에, 땅을 소유하기 보다는 경외하는 자세로 이용하며 살았다. 나름대로 행복하게 자연과 벗하며 살았던 그들의 삶이 철저하게 망가진 것은, 서양인이 들어오면서부터다. 당대 최고 지성인의 모임이었던 영국국립학회에서는, 캡틴 쿡을 비롯한 탐험가들의 보고를 받고는, 호주 원주민이 ‘반인반수’라는 공식적 입장을 내놨다. 이런 결정은 칼과 총을 들었던 서양인에게, 원주민을 학살하고 땅을 빼앗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해 줬다. 이제 와서 그런 일들이 잘못이라며 사과를 하고는 있지만, 호주 원주민에게 남겨진 선택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안중근은 물론, 3.1운동을 일으켰던 한국 민중의 단결력도 그들에게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해온 한 원주민 예술가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한 작품을 내놨다. 보통 크기의 액자에 ‘abhoriginal’이란 단어를 썼다. 사전에는 없는 이 단어는 두 단어의 합성으로, ‘abhor’은 연한 색으로, ‘iginal’을 진한 색으로 구분해 놨다.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원주민은 ‘역겨운 증오의 대상’이라는 통념에 대한 고발이다. 미술관을 나오면 바로 옆에 명품을 파는 백화점이 있다. 길 쪽으로 난 윈도우에 진열된 상품은 2천불짜리 루이비통 신발과 그 보다 몇배 비싼 가방들. 그리고 길에는 황금색으로 도금된 벤츠 지바겐 G-63이 서 있다. 아마도 3만 불은 나갈 것이다. 원주민들은 그 앞을 서성이며 2리터짜리 탄산음료를 통째 들고 마시고 있었다. 그들 몇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혹시 그들 중에 안중근같이 형형한 눈빛을 가진 사람은 없는가 하고.

3. 원주민 / 한민족

호주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입자는 어정쩡하다. 이태리, 그리스, 유대인, 레바니즈, 심지어 중국인과 베트남 출신처럼 호주 사회에 깊이 들어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전문직업인들은 있어도, 사회적 이익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집단으로서의 존재감은 잘 드러내지 못한다. 배달의 민족은 외국에 나가서도 뭔가 독특하게 산다. 개인적이며 은둔적이라 할까? 그걸 탓할 수는 없다. 타고난 것이니까. 문제는 그런 태도로 인해 타문화권 사람들에게 경멸의 이유가 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교민 역사가 70년 정도 되었으니, 이젠 호주 사회에 뭔가 보탬이 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민족이 잘 할 수 있는 부문이 있다. 호주 원주민을 품는 일이다. 이 일은 호주 땅에 들어온 200여 민족 중, 한국인에게 특별히 열려 있는 문이다. 이미 서양인들은 손을 놔 버렸다. 나라에서는 경제적 지원을 내 세우고, 공공기관들은 자기들이 점거한 땅의 원소유주가 원주민이라는 입장문을 인터넷 포탈의 첫 페이지에 내 놓기는 하지만, 현실감은 별로 없다. 그들의 속마음이 이미 다 드러났기 때문이다. 170년 이민역사를 가진 중국 커뮤니티도 마찬가지다. 원주민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민족은 한국인이 제격이다. 중국과 러시아, 서양과 일본에 의해 심하게 멸시받았던 긴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코비드로 인해 ‘지구촌’이라는 개념이 갑자기 위축되었다. 각자도생 시대가 도래했다. 호주의 한인들도 조국을 좀 덜 바라보고, 현지에서 융화되어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노력 중의 하나가 원주민을 품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고 있는 많은 축복이, 원주민의 피가 흠뻑 적셔진 황갈색 땅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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