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관념에 엄격한 토라는 수 많은 율법의 규정으로 삶이 경직되고 자유를 억압당하는 일상이 되지 않을까하는 중압감을 갖게 한다. 하지만 탈무드는 세상의 시각과 달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사랑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그것이 신명기서에 담겨 있는 윤리의 기준이라고 강조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청사진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요셉의 용서와 형제들
요셉의 용서와 형제들

1. 사랑의 하나님

“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신명기7:12-13)”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구절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부각시킨다.  

(신 10: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신 10: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신 4:37)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인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이 구절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스라엘 선택은 오직 사랑에 기초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과 그의 용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과 그의 용서

2. 내재된 하나님의 사랑 

탈무드는 ‘모세의 율법 책의 총정리’로 불려지는 신명기서가 오히려 사랑의 언어로 적셔져 있다고 평가한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어근인 ‘AHV’가 출애굽기에 두번 , 레위기에 두번, 민수기에는 아예 없지만 신명기에는 23번이나 등장한다고 설명한다. 신명기는 사회적인 축복과 변환을 가능케하는 사랑의 능력을 담은 책이라고 탈무드는 자랑하듯 답한다. 흔히 기독교를 사랑과 용서의 종교라고 평하는 반면, 유대교는 법과 인과 응보의 종교라고 비교를 한다.  하지만 탈무드는 그저 유화적 태도를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용서의 분명한 관념을 표출한 것은 유대교에 명백한 뿌리를 두고 있음을 강조한다. 사람 간의 용서는 요셉이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그의 형제들을 용서했을 때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용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을 때 민족 전체에게 죄 사함의 초월적 대속죄일이 유대력의 절기로 태동되는 성경적 사건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유사하게 신약 성경에서 사랑에 관해 표현할 때도, 가장 핵심적인 구절로 신명기 6:5 의 주 너의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레위기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19장 말씀을 직접 인용하였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추방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추방

철학자 해리 레드너는 윤리를 크게 네가지로 구분했는데, 1. 시민 윤리는 그리스와 로마의 도덕 관념을 2. 의무의 윤리는 유교, 크리스나이즘, 스토아 철학을 들었고 3. 명예의 윤리로서는 페르시아, 아랍, 투르크과 이슬람과 기독교를 그 유형으로 구분 하였다. 네번째로 구별한 것은 그가 간단하게 ‘윤리’라고 불렀는데 레위기와 신명기서에서 그 원형을 찾았다. 그는 그 윤리를 ‘사랑의 윤리’라고 부르고 서구의 윤리의 독특성을 대변한다고 했다. 

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은 아주 특별한 유형의 사랑으로 세상의 개념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극도로 이타적인 개념으로 장소와 시간에 구애없이, 태생적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뭇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고 대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불교가 유사한 이타적 사랑의 개념을 갖고 있지만, 타인 보다는 개인적인 수행에 집중하고  유일신과는 그 관계성이 발전되지 않는 종교성을 가졌다. ‘유교’ 역시 윤리의 의무로 사회 속에 타인과 함께 이루어가는 사회성에 대한 중요한 강조점을 가졌지만, 존재하는 신과 사랑의 교류가 없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의 용서- 욤 키프르
신의 용서- 욤 키프르

3. 탈무드의 사랑의 윤리

탈무드는 토라의 윤리를 평가하는데 있어, 첫째, 고대의 어느 종교와 달리 거칠거나 인류애에 있어 부족함 없는 실제성을 갖고 있었고, 신이 직접 인간의 존재, 보살핌과 행복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둘째는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또한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모델을 보여주셨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사랑을 기반한 친절과 긍휼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근본 명제로 삼고있다고 부연한다.  

신명기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명기10:18-19)”

토라
토라

탈무드는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로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에게도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고 요청하신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와 가인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반문한다. 사실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사건과 아브라함이 간청했던 소돔은 하나님께 용서 받지 못하고 심판받고 흐트러지고 결국 멸망 당하고 말았다. 성경에 겨우 처음 등장하는 신의 용서의 사건은 시내산에서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한 하나님께 모세가 간절히 기도 드려서 용서를 받은 것을 대 속죄일로 기념하게 된 것이라고 되짚는다. 왜 그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을까? 에 대한 탈무드의 대답은 “하나님은 인간이 서로를 용서할 때까지는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하는 것으로 창세기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 이후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시작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하고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레아는 야곱을 사랑하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고 또 요셉을 사랑했다. 그러한 사랑의 이야기는 창세기에 넘쳐난다. 하지만 창세기의 거의 모든 사랑 이야기는 불화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야곱과 에서, 라헬과 레아, 그리고 요셉과 형제들은 모두 서로에게 긴장된 관계들이다. 창세기에 드러난 사랑으로는 진정한 사랑의 사회를 건설 할 수 없었다. 흔히 ‘아가페’ 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의 사회를 위해서는 아직 불충분한 것들이었다고 평가한다. 그것들은 갈라질 수도 있고 혹 연합할 수도 있는 불확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

그런 면에서, 앞서 말한 ‘네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그저 기계적으로 내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각 개인이 필요로 하고 관심을 갖고 존경의 관계로 접어들게 하는 그런 정의를 말한다. 탈무드는 모든 이웃은 사랑의 법 앞에 동등하게 인식되어야 하고, 그래서 정의와 사랑은 결코 떼래야 뗼 수 없는 상호 관계라고 설명한다.   

정의 없는 사랑은 경쟁적이 되고 결국 미워하는 관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긍휼과 자비의 힘을 사라지게 한다. 세상엔 이 모두가 있어야 한다. 이런 독특한 윤리적 비전, 즉 이웃과 나그네  모두를 향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이 바로 탈무드가 주목하는 ‘사회 윤리의 밑 그림’이다.  

토라는 ‘율법으로서의 사랑’과 ‘사랑으로서의 율법’이 동시에 담긴 ‘하나님의 청사진 ’이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 (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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