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

12세기의 추앙 받는 현자 마이모니데스는 토라에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명기 31:19)”고 한 모세의 말을 기초로 ‘모든 이스라엘 남성은 자신 스스로의 토라 두루마리를 써야한다’ 고 강조했다. 가령 부모로부터 토라 두루마리를 유산으로 받았다 하더라도,  마치 시내산에서 직접 토라를 받은 것처럼 자신의 것으로 써야 한다는 뜻이다. 모세는 여러 율법 가운데 이 조항을 마지막 것으로 남겼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해야할 각별한 지침이었기 때문이다. 

1. 모세의 마지막 율법

이는 특별히 후진들과 미래 세대들에게, 조상이 이미 시내산으로부터 토라를 받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말고, 매 세대마다 새로 받고 더욱 새롭게 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슬람의 쿠란은 유대인을 ‘책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탈무드는 유대교 전체는 사람과 책이, 곧 유대인들과 토라 사이의 확장된 사랑 이야기 라고 간주한다. 유대인은 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민족이다. 읽고, 연구하고  논쟁하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마치 토라가 왕인 것처럼 여겨 왔다. 장막절 바로 후의 심캇 토라 때 유대인들은 두루마리가 마치, 신부인 것처럼 회당 안에서 시작해서 춤을 추며 회당 뜰에 나가 오랜 시간 두루마리와 함께 둥글게 돌며 춤추고, 그 이후엔 음식을 나누며 명절처럼 이날을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

말씀을 필사하는 유대인
말씀을 필사하는 유대인

수 천년 동안, 후대의 현자들은 모세 오경으로부터 마지막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토라의 주석을 써 왔고, 특히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는  ‘ 나의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규례와 법, 나의 종 모세의 토라를 기억하라!’ 고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또 천 여년이 흐르고 마지막 선지서와 바벨론 탈무드 사에엔 유대교의 마드라쉬와 미쉬나 그리고 게마라와같은 전승이 지속적으로 문서 유형으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또 오랜 세월동안 주석에 대한 또 다른 주석을 성경 주해와 법 코드와 철학적 방법으로 발전시켜 왔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대적 문서는 직간접으로 토라에 대한 주석으로 쓰여져 온 셈이다. 수백년의 세대를 거쳐, 이는 그저 여느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러브레터였고, 선물이며, 결코 파기하거나 철회하지 않는 결혼 서약서와 같은 소중한 문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로서 쓰여진 헌법이며 그 나라 백성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약속된 땅으로부터 흩어질 때 이는 과거의 증거 문서가 되었고 미래의 소망이 되었다. 

말씀에 열중하는 유대인 소년
말씀에 열중하는 유대인 소년

2. 토라는 고향집

시인 하인드리히 하인은 토라를 ‘유대인들의 고향집’이라고 불렀다. 죠지 스타이너는 ‘토라는 모든 주석이 귀환하는 집이다’라고 표현했다. 현자들은 비록 흩어지고, 영토 없이 떠도는 힘 없는 민족이었지만 그들에겐 영적인 집이 있었다라고 보았다. 유대인들에겐 말씀 만이 전부인 시기가 있었다. 11세기 라비누 게르솜에 의해 쓰여진 대속죄일의 규례로 읽혀지는 시는 이렇게 마음을 찢는 구절로 읽혀지고 있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오직 토라만 남았네”라고.. 그들은 집도, 안전도, 자유도, 오직 책 한권만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였다고 탈무드는 상기시킨다. 

이것이 그들의 세상이었다. 한 미드라쉬에 의하면, 토라가 바로 창조의 골격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먼저 토라를 두고 그리고 우주를 창조 했다”는 것이다. 전체 토라는 원래 하나였고 ‘바로 신비한 하나님의 이름이었다’고 보는 전통적 견해도 있다. ‘하나님이 곧 토라’이다라는 의미이다. 또 이는 하얀 불 속에 담겨진 까만 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Y Shekalim 6:1). R.Yose 키스마는 토라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로마인들에게 붙잡혀 토라 두루마리로 싸여진 채로 불태워 죽었다. 죽어가는 스승을 보던 제자가 그가 무엇을 보는 지를 물었다. 그러자 스승이 “ 나는 양피지가 타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글자들은 공중에 하늘을 날고 있었다 (Avoda Zara 18a)”고 대답했다고 한다. 비록 로마인들이 두루마리를 태워도 결코 토라를 없앨 수는 없었던 것을 대변하는 일화이다.  

바벨론 포로 생활
바벨론 포로 생활

3. 생명으로의 토라 

모세가 그의 삶의 마지막이 가깝고, 토라 이야기의 마지막에 다다르자, 마지막 명령은 자연히 계속 쓰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그들의 입에 말씀이 있게 하고 그들이 결코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에 같이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생명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탈무드는 다윗 왕이 자신이 언제까지 살 수 있는 지를 하나님께 물었던 스토리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그것은 운명에 달린 것으로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라 대답하였지만 한가지 그가 안식일에 죽을 것이라는 것을 귀뜸해 주셨다. 

탈무드는 다윗이 사는 동안 매 안식일에 토라 공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어느날 다윗이 죽을 때가 다가오자 죽음의 천사가 파송 되었지만, 다윗이 생명이 끊임없이 공급되는 토라를 열중해서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데려갈 수가 없었다. 결국 천사는 특별한 전략을 세웠는데, 왕궁 나무 꼭대기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다윗이 궁금해서 사다리에  올라 그것을 보려 했는데 그만 한 쪽 사다리가 부서진 것을 모르고 떨어져 죽게 되었다고 한다. 공부하는 걸 잠시 멈춘 그 때에 비로소 죽게 되었다고 (Shabbat 30a-b) 전해지고 있다. 

모세가 받은 하나님 말씀(영화 장면)
모세가 받은 하나님 말씀(영화 장면)

탈무드의 현자들은 다윗 왕이 전쟁에 용맹한 전사이고 위대한 왕이기 보다는 참회하는 토라애찬가로서 그를 묘사하려 한 것을 엿 볼 수 있다. 실제 그는 많은 시편을 남겼고 말씀을 노래하였다. 다윗왕을 통해, 유대인들이 토라를 공부하는 한 그들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탈무드는 힘을 싣는다.     

토라는 계속 쓰고 공부 하라는 모세의 마지막 명령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정신은 심캇 토라 때에 마지막 성경 묵상을 마치자마자 그 날 다시 처음 부터 모세오경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전통으로 계승하고 있다. 토라의 마지막 말과 처음 히브리 단어는 ‘Heart’라는의미로 읽혀진다. 탈무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배우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유대인의 심장이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요약한다.    

이정표
이정표

이를 확증이라도 하듯, 신약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 요한은 그 역시 유대인으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복음1:1-4)” 라고 어디에 생명이 있는 지 그의 책 서두에 이 말을 적었다. 

생명이 위태위태한 허덕이는 인생들에게, 어디에 들려 충전을 해야 할 지 탈무드는, 분명한 이정표를 세대를 거쳐 친절히 마련해 두고 있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 (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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