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즐기는 홍콩 영화나 서부 영화의 주제는 대체로 ‘원수’ 갚는 일이다. 사람들은 원수를 갚고 복수하는 데 희열을 느끼고 의당 그런 결론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흥행의 중요 요소 이기도 하다. ‘복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원한을 속 시원히 푸는 자연스런 감정이다. 하지만, 

좌측부터 영화 대부 – 마피아 세계의 복수와 응징 / 중국 영화-복수 / 복수 주제의 영화
좌측부터 영화 대부 – 마피아 세계의 복수와 응징 / 중국 영화-복수 / 복수 주제의 영화

1. ‘복수하지 말라’

성경에서는 ‘복수’를 분명한 어조로 금하고 있다. 레위기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또한 예수가 바리새인들에게 가장 큰 계명이 뭐냐고 물을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22:38-41)” 고 가장 큰 계명으로 소개한 성경의 핵심 구절이기도하다.  

토라는 요셉을 통해 그를 죽이려던 형제를 복수하기 보다 대신 용서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대속죄일에 유대인들은 ‘용서’를 구하며 새해를 맞이 하도록 법률로 정해 절기를 지킨다.

고문과 살상의 잔재들-킬링필드
고문과 살상의 잔재들-킬링필드

현자 마이모니데스는, 어떤 사람이 원한을 오래 마음에 담고 있으면, 언젠가 복수를 하려고 하게 된다. 토라는 원한을 품지 말라고 엄격하게 경고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감정이 전부 제거되고 더 이상 기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조언한다. 이것이 사회와 사람이 서로 관계(Human interaction)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바른 원리라고 그는 설명했다.   

탈무드는 여기서, 마이모니데스가 관계를 말할 때, 유대인의 관계를 지칭하지 않고 사람들이라고 말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모든 인류가 그렇게 해야한다는 의미이다. 

홀로코스트-화장된 시체
홀로코스트-화장된 시체

 

2. 사상가들의 견해

‘신의 복수’에 대해서 깊은 통찰력을 가진 세명의 유명한 사상가들이 있었다. 잰 아스만과 헨리 애틀란, 미로슬라브 폴프라는 인물들이다. 그 중 잰 아스만은 성경에 소개되는 히브리적 문명과 고대 문명을 비교했다. 그는 ‘왕’은 신적 속성을 갖는다고 보았고 왕의 분노는 곧 신의 분노라고 생각했다. 신의 분노는 왕의 분노를 정당화하곤 했다. 그래서 원수들에 대한 왕의 복수는 신의 일이라고 간주했다. 폭력은 종교적인 제제를 받곤했다. 성경은 대조적으로, 세상의 왕과 신 사이에는 연결 될 수 없는 큰 거리감이 있다고 보았다. 분노는 신학화되고 그래서 땅으로부터 하늘로 전송된다고 보았다. 

희생된 여인들과 어린아이들
희생된 여인들과 어린아이들

아틀란은 비슷한 관점에서, “세상의 폭력을 신성하게 처리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초월의 세계로 가도록 이를 사람이 거부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러므로, “폭력의 초월성은 결국 세상의 지평으로부터 사라져 축출되는것이다”라고 보았다. 다른 말로하면 복수가 인간의 셈법에서 사라졌다는 말이다. 이는 사람이 아니라, 신에게만 복수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인식이다. 성경엔 분명하게 사람에게 신이 복수를 행하라고 명령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아말렉과 미디안 족속을 멸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2성전이 무너지면서 예언의 시대가 종료되자, 이 두사건 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유일한 사건들로 남게 되었다.

벗겨진 신발들
벗겨진 신발들

볼프는 이러한 분석에 동조하는데 더해서, 폭력이 존재하는 세상에선 하나님과 사람의 두가지 폭력으로부터 모두 도망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의 비폭력성에 대해 지지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오히려, 그들 스스로 폭력을 절제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심판과는 무관한 분이라고 말하면서 결국, 사람의 손에 심판을 맡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폭력은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되고 심판의 칼을 사용하지 않는 신을 믿음으로 인해서 더 은밀하게 커가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신적 복수를 믿으며 비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별 인기가 없고 특히나 서구의 신학자들에겐 더하다” 고 주장했다. 구 유고슬라비아의 민족전쟁으로 실제의 폭력을 마주 대했던 볼프는 동일한 성경의 문맥을 보면서도 아주 다른 생각을 표출해 내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면 안된다. 하지만 곧 사람의 비폭력은,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의 거절이라고 인식되게 되었다. 전쟁에서 사람들은 약탈하고, 태우고, 모든걸 파괴시켰다. 딸과 자매들이 강간을 당하고 남자들은 목이 베였다. 저주받은 땅에는 선량한 피가 적셔들었고 모든 것을 죽게했다.

요셉의 용서 
요셉의 용서 

3. 복수하지 않는 유대인 

이 일들은, 중세의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의 어린이들의 피를 먹고 우물에 독을 뿌리고 신성을 더럽힌다고 사랑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학살한 역사를 기억나게 한다. 성전 파괴의 날(Tisha B’Av)에 듣는 애가는 지금도 죽은자들의 신음의 소리를 듣게 한다. 그 신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복수에 항변하고 있다. 이에대해, 탈무드는 “유대인들은 복수하지 않는다. 믿음은 이것을 하나님께 유보하는 것이다. 복수는 오늘 하루를 마감하며 이 편 끝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정의’가 아니다.”라고 가르쳤다.  이 땅에서는 당분간 충분히 살수 있는 삶을 확인하고, 다른 것 보다 두려움이 비로소 사라진 믿음으로 영원한 삶을 맞이 할 때 진정한 ‘정의’의 내실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 유대인들은 2차세계 대전에서 6백만명이 죽고 그 중 백오십만명의 어린아이들이 죽어간 홀로 코스트를 뒤로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갚지 말고 세상을 치료하자(Not Revenge, but repair the world )” 는 슬로건을 건국 이념으로 삼았다.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용서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용서

완전한 정의를 이 땅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르게 했던 노래이다. 진정한 믿음이란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 복수를 유보하는 것이다. 여러 민족이 때로, 종교적인 열정으로 가득채운 갈등의 세상에서, 복수하는 것이 정의의 구현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탈무드는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께 남겨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렇지 않을 때 인류는 홍수를 맞이 해야 했고 하나님은 세상에 인간을 만든 것을 가슴아프게 후회했다(창세기6:6)”고 경고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인 바울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롬 12:20)고 상기시켰다. 복수는 하나님께 속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된 수 많은 복수가 역사 속에 산재해 있다. 복수할 권한 없이 기대하는 진정한 ‘정의’는, 저 끝 온전히 하나님의 신적 영역에 속한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감당되지 않는 어려운 숙제이다. 또 다시 믿음이 중요한 이유이다. 샬롬!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20-21).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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