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시대의 희생 제사 

지난 월요일, 유대인의 신년(5783년)이 시작 되었다. ‘로쉬 하샤나’로 불리는 신년은 또한 ‘욤 하민’이라고도 불리는 데 이 뜻은 ‘심판의 날’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새해가 사과나 석류와 같은 과일들을 꿀에 찍어 먹는데, 풍성하고도 즐거운 한해가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나타내는데,  이 때, 이들이 읽는 토라 포션은 ‘회개’에 관한 것이다(신명기 29, 30장). 이들은 풍성하고 달콤한 한 해를 맞이 하기 위해서 열흘 동안 쓴디 쓴 회개의 시간을보내야,  생명책에 기록 된다는 ‘대 속죄일’을 맞이하는 아이러니한 절기를 수 천년동안 맞이하고 있다.  

이 역설의 절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의 대표적 현자라고 불리는 마이모니데스와 나흐마니데스는 상당히 다른 가르침을 말하고 있어 더욱 회개의 의미를 깊이 발견하게 한다. 

진정한 회개-결단

1. 마이모니데스

마이모니데스는  토라에는 부정정인 것과 긍정적인 교훈의 양면이 담겨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일부러 또는 모르고 죄를 범했을 때는 민수기4:6-7절에 있는 것 처럼, “ 그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고백한다(confess in words)’는 말은 입으로 말한다는 의미이고 계명의 긍정적인 측면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어떻게 고백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내가 심각한 죄를 범했고 간청합니다. 주여, 저는 괴퍅스럽게 행동했고 주께 범죄 한것을 회개하며 수치스러움을 후회하며 다시는 이런일을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이 회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더욱 세세하고 완전하게 회개할수록 그것이 더욱 가치있는 회개의 자세라고 덧붙였다. 마이모니데스는 회개의 근원을 ‘성전’과 ‘제사’에 두었다. 고백의 진정성을 1.잘못을 인정하고, 2.수치를 후회하고 3. 결단하고 다시 범죄 하지 않는 것이 포함 될 때 회개가 온전해진다고 간주했다.  그렇다면 성전이 파괴되고 희생제물을 드리는 예례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행해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이에대해 마이모니데스는 이스라엘을 떠나서도, 밖에서  제사 의례를 죄에 대한 말의 고백(Vidui)이 대신한다고 보았다. Vidui가 외적 행동이라면, 회개는 내적인 연계성이라고 정의했다. 결국 성전과 희생 제물 없이도 두가지 요소를 충족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한 셈이다. 

회개의 시작 – 고백

2. 나흐마니데스  

이에 반해 나흐마니데스는 상당히 다른 견해를 주장 했는데, 신년의 토라 포션인 신명기 30장1-10의 “ 하나님이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고 잘못한자들이 흩어졌다고 회개하고 한다면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구절들을 인용하여 이 토라 포션의 의미는 ‘Lashuv’가 Teshuva의 어원으로 회복과 귀환의 의미를 가졌다고 보았다. 그는 ‘죄’의 의미를 1. 타겟을 벗어 났다는 것과 2. 가지 말라야 할 곳에 갔다는 ‘장소’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래서 가장 큰 죄에 대한 ‘벌’을 ‘축출’로 보았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해서 에덴에서 쫓겨난 것과, 가인이 영원한 방황자로 저주 받을 것을 들 수 있다. 유대인들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우리의 땅에서 쫓겨 났다”는 기도문을 낭송하곤 하는 데 이것이 잘못된 곳에서의 행동이 집이 아닌 유배지의 삶으로 결과 지어진 것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유대인의 신년의 인사-  풍성하고 탈콤한 새해 되세요!

죄는 신으로 부터 멀어지게 하고 나그네가 되고 이방인과 유배자가 되게 한다. 그래서 ‘회개’는 물리적으로 이스라엘 땅으로의 ‘귀환’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적인 ‘양면의 귀환’을 담고 있다고 탈무드는 강조한다. 

마이모니데스는 죄와 회개는 제사장의 영역에 있는 제사와 예배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가장 좋은 예는 대속죄일에 대 제사장이 ‘자신의 죄와, 가족과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속죄’를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반면, 나흐마니데스는 회개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휩쓰는 넓은 개념으로 제사장 보다는 선지자의 세계의 의미로 보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선지자는 백성들의 잘못을 경고했고, 불순종의 결과로 패배와 축출을 맞이 하게 되곤 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이 일상의 일들로 돌아가는 것을 그들의 땅으로 귀한하는 서곡으로 간주하곤 했다. 각 개인의 회개가 쌓이고 나라가 귀환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런 면에서 회개는 속죄 보다는 귀환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성전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더 촛점을 두고 있고 개인을 넘어 유대인 공동체적인 사건(네가 어디 있느냐?) 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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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회개의 양면

죄의 첫번 째 제사장적 감정은 ‘죄책’이고 선지자적인 감정은 ‘멀어짐’이다. 제사장에게는 속죄와 성결을 위한 ‘희생 제사’가 연결되고, 선지자에게는 ‘행동의 변화’로 치유와 회복이 직결된다.  제사장에게는 먼저 개인의 속죄를 요구하는 수동적인 의미로, 선지자에겐 민족 전체가 돌아오는 능동적의미로 적용되고 있다. 이는 개인이 죄를 짖고 ‘회개’ 하고 민족이 ‘유배’를 당하고 ‘귀환’ 하는 패턴을 가졌다. “ (신 30: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하고 계명이기 보다는 예언과 약속을 담보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마이모니데스와 나흐마니데스는 서로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토라의 ‘회개’의 양면을 더 복합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는 제사장과 선지자간의 마찰이 없고 두가지 목소리이지만 한가지 대화를 구성하고 있다. 탈무드는 이스라엘의 제2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과 선지자의 양 시대가 끝났지만, ‘회개’의 양면성이 하나로 합해지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지금도 대 속죄일에는 예배와 고백과 자선이 병행되고 있다. 그날 아침에 부르는 ‘회개’의 노래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 나의 금식은 가난한자와 나그네와 이방을 돌아보는 진정한 회개가 없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될 것이라” 는 ‘진정성’과 요나의 ‘이방’에 대한 ‘축복’과 우상 바알을 대항한 엘리야의 갈멜산의 ‘하나님의 승리’가 선포된다. 

유대인의 귀환

유대인의 신년의 회개는 마이모니데스의 ‘죄’와 ‘속죄’, 나흐마니데스의 ‘유배’와 ‘귀환’ 의 역설적인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을 향한 성결과 회복의 축복을 담고 있다. 현자들은 “ 이제 성전은 사라지고 선지자의 시대도 끝났다. 회당이 성전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다른 나라가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탈무드는 20세기에 들어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오고,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2000년동안의 방황이 끝나고 고토로의 귀환이 현실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들에게 이제 땅과 민족이 회복되는 물리적 귀환이 이루어 졌다면, 이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영적 귀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덧붙인다. 

달콤하고 풍성한 삶을 기재하는 신년에 유대인들은 회개로 새해를 열고 있다. 자신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의 축복을 금식하며 맞이하는 것이다. 사뭇 수천년 동안 보이지 않는 그들의 기도가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데도, 자비한 신은 올해도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뭇 세상에 흘러가게 하신다. 모든 사람의 영적 귀환을 위해서이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 (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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