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예상치 않게, 유명 랍비인 이삭과 리브가 부부가 그다지 가깝게 소통하며 지낸 것 같지 않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들의 관계가 아브라함과 사라, 또는 야곱과 라헬 부부와 같지 않았고, 그들은 문제가 있을 때 서슴없이 대화를 나눴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네치브는 리브가가 처음 이삭을 만날 때의 장면이 광야에서 오후에 묵상하는 모습이었고 리브가는 베일을 쓰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 장면에 대해서, 리브가는 스스로 두려움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그의 아내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공포심은 이때로부터 그녀의 마음에 고정되었다고 보았다.

가족간의 불통
가족간의 불통

1. 이삭과 리브가의 소통의 부재

이삭과 리브가의 관계는 편하거나 솔직하고 소통적이지 못했다. 이런 소통의 부재는 연속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결과를 도출했다.  리브가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날 때 ‘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창25:23)’고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삭에게는 결코 알리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리브가가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했고 야곱을 에서 보다 더 사랑하게 된 이유가 되기도했다. 만약 이삭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에서를 선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몇년이 지난 후에,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는 것을 듣고는 속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야곱에게 에서인 것처럼 행동하라고 말한다. 왜 그녀는 이삭에게 이삭이 바로 축복 받게 되어있는 아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을까? 말하지 않은 것으로 아이들이 자라는 오랜 세월 동안 남편을 이에 대해 무지하게 만들었다. 

이삭의 야곱 축복
이삭의 야곱 축복

만약 이삭이 이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두 아이들에게 각각 다른 축복을 기도하고 에서에게는 부와 능력을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 임하고 많은 열방이 너를 섬기고 네게 절하게 될 것이라”고 축복했을 것이라고 탈무드는 진단한다. 야곱에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자신에게 주신 축복이 야곱에게도 고스란히 임하기를 당연히 기도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손의 축복과 약속의 땅과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으로 민족의 수가 늘어나고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동일한 약속이다. 결국, 결과가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바로 앞의 야곱
바로 앞의 야곱

2. 가족이 치르는 대가

이삭은 미리 알았다고 해서 에서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주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 때로부터 하나님께 직접 받은 언약이기 때문이다.  리브가가 세운 총체적인  계획으로 야곱이 수행한 속임수는 처음부터 결코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 리브가는 이것을 알지 못했을까? 

탈무드의 현자들은 그 이유는 남편과 대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이삭은 이제 늙고 눈도 어두워졌다. 야곱에게 속고 심하게 몸을 떨었을 정도로 (창27:33) 충격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정신이 들자 에서에게 “ 네 동생이 속였다”는 말을 하자, 에서 역시 배신 당한 것으로 마음이 분하고 미움이 증폭하여 죽이고 싶게 되었다. 결국 리브가는 야곱을 피난 보내고 근 20여년을 사랑하는 아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소통의 부재로, 가족 내에 분노가 증폭하고 형제 간에 살인을 저지르고자 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케네디와 후르쇼프의 대화
케네디와 후르쇼프의 대화

야곱 자신에게도, 속인 결과는 평생 그의 아내들과 자식들간에 분쟁과 갈등의 요소로 남게 되었다.  바로를 만난 자리에서도 그는 “ 평생 험악한 삶을 살아 왔다고(창47:9)”라고 자신의 인생을 평가했다. 애초부터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네 명의 인생이 거짓 하나로 인해 평생 마음의 상처를 입고 살게 되었다. 결국 이삭은 아무런 속임수 없이도, 아브라함의 축복을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가 인생에서 치르는 값비싼 대가가 되곤한다. 

토라는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에 대해 사람들의 실제 삶과 실제 문제에 대해 아주 진솔하게 삶의 가이드를 제공한다. 결국 소통이 문제이다. 

극적인 화해 – 쿠바의 핵 전쟁 위기
극적인 화해 – 쿠바의 핵 전쟁 위기

3. 소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 할 때, 말씀으로 자연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말하는 영이 되었다(창2:7)” 고 기록하였다. 말하는 것은  곧 인간의 삶이다. 삶은 관계이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망과 두려움과 감정과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어느 리더라도 목표를 강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열린 소통으로 세워야한다. 이것이 바로 가정과 팀과 회사의 문화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패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존중 받아야한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에서 ‘수치 윤리’를 추구한 것과 유대교에서의 ‘죄책감의 윤리’와의 확연한 차이점이라고 조언한다.  죄책감은 행동과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 한다. 그러나 ‘수치심’은 그렇지 않다. 수치심은 마음에 남아 분노와 증오를 쌓게 한다.

때로 세상의 역사는 대화의 부재로 인해 비극을 겪거나 또는 비극이  축복이 되기도 한다. 분명한 대화의 필요성은 극적인 순간에 더 실감하게 된다. 1962 케네디 대통령 재임 시절에, 쿠바의 미사일 위기가 미국과 구 소련 사이에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던 때가 있었다. 위기의 최 절정의 시기에, 로버트 맥나마라의 회고 영화, ‘전쟁의 안개’에 의하면, 케네디는 두가지의 메시지를 니키타 후르쇼프로부터 받았는데 하나는 유화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호전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케네디의 참모들은 거의  후자가 진의를 담은 것일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미국의 주소련 대사였던 르웰린 톰슨 Jr 는 소련의 대통령을 잘 알고있는, 심지어 한 때 후르쇼프 부부와 함께 살았던 기간도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케네디에게 암만봐도 두가지 메시지 중 그의 성품으로 보아 유화적인 것이 소련 대통령의 진의이고 아마도 호전적인 것은 그의 장성들의 마음을 다루기 위한 제스쳐의 한 방편 이었을 것이라고 조언 했다. 케네디는 톰슨의 말에 귀 기울였고 후르쇼프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는 말로 진정시키게 되었고 결과는 완전히 뒤 바뀌게 되었다. 만약 당시에 톰슨이 그자리에 없어서 무엇이 진정한 대화의 진의이고 아닌 지를 분별할 수 없었더라면 세계사에 어마어마한 비극을 초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듣는 이에게 소통하시는 하나님
듣는 이에게 소통하시는 하나님

가정의 부모나 사회의 리더들은 정직하고 열린, 그리고 존경어린 소통을 세워 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잘 듣는 것을 포함한다. 이삭의 가정에 소통의 부재로 인해 생겨난 뼈아픈 고통은 대를 이어 대가를 치렀다. 이는 언제든, 우리에게 비극으로 다가 올 수 있는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화가 나면 입을 닫고 속으로 분노를 쌓기보다, 소통으로 오해를 풀어 나가는 리더가 되어야 하겠다. 무엇 보다, 이것이 인간을 창조한 신의 관계 방법이기 때문이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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