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을 흔히 약싹 빠르고, 거짓과 술수에 능한 세속적 인물이라고 판단하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야곱을 평가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그는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팥죽 한그릇으로 형의 마음을 빼앗고, 엄마인 리브가와 공모하여 에서인척 변장을 해 아버지 이삭을 속여, 대신 축복을 받고 외삼촌이 사는 먼 곳으로 도망을 친 인물이므로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하다. 

야곱의 꿈-하늘에 닿은 사다리

1.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하지만 그는 누가 진정한 유대인의 아버지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아브라함과 이삭, 심지어  모세도 얻지 못한 색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 스스로  “우리는 야곱의 회중” “이스라엘의 자녀”라고 자부심을 내재한 칭호로 부른다는 점이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태동되게 한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끄집어 내지도 않았고 민족에게 토라를 갖다 준 인물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쉬마엘과 에서와 같은 아들을 배출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달리, 그의 자녀들이 모두 신앙 안에 머물렀고 그는 성공적인 삶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토라의 첫 장면은,  바로 벧엘의 사건이다. 벧엘의 옛 이름은 ‘루스’라고 불렸다. 이곳은 야곱이 살던 가나안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브엘쉐바를 거쳐 이곳에 이르고 돌베게를 베고 광야에서 잠이 들었을 때 땅으로부터 하늘에 닿은 사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네 자손이 티끌 같이 될 것이고 동서 남북으로 모든 열방이 네 자손으로 인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반드시 돌아 오게 할 것이다. 이걸 다 이룰 때까지 절대 너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곳이다. (창28:14-15)

얍복강가의 씨름- 새 이름-이스라엘
얍복강가의 씨름- 새 이름-이스라엘

그 때 야곱이 잠을깨서 한 말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정말 하나님이 여기 계셨지만 내가 알지 못했구나! 여기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도다!” 하고 고백했다(창세기28:16-18). 

야곱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몸소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고백이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뜻이다. 

벧엘은 두려움과 외로움에 처한 야곱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처음 알게 해준 곳이다. 

라반과 야곱의 계약
라반과 야곱의 계약

2. 얍복강에서 만난 하나님

그리고 20여년의 세월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보내고 드디어 가나안을 향해 도망 나올 때, 얍복강에 이르러 형 에서를 다시 만나야 하는 두려운 밤에 천사와 다시금 씨름을 하게 된다. 

그 때, 천사가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32:29,31)” 

이 내용들이 야곱에게 보여진 분명한 영적 경험이었다. 이는 야곱이 둘다 두려움과 불안한 상태에 있을 때 일어난 일들이다. 아직 문제가 산적해 있고 해결 되지 않은 지점에서 용기를 얻고 그 남은 여정을 갈 수 있는 동기 부여가 된 곳이다. 

탈무드는 야곱이 바로 그런 힘을 유대인들에게 부여해 준 사람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이것은 단지 이 민족이 비극을 겪은 비운의 민족이라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두 번의 성전의 파괴와 바벨론과 로마의 침공과 추방과 핍박과 중세의 포그롬과 19세기의 극성을 부린 반유대주의와 급기야는 대량 학살로 이어진 ‘홀로코스트’ 를 통해서 다른 어느 민족이라도 세상에서 분명 사라지고 말았을 상황에서 역사 속에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탈무드는 이스라엘이 한 번의 사건을 치를 때마다, 더욱 새롭게 태어났고 더 높은 경지의 수준에 다다르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사랑하는 라헬과의 만남
사랑하는 라헬과의 만남

3. 진정한 리더

바벨론 포로기에 토라와 연과하여 더 깊어 졌고, 로마 정복시에는 구전 토라의 문자적 기념비가 세워졌고, 미드라쉬, 미쉬나, 그리고 게마라가 태동되게 되었다. 중세에는 법의 기초가 세워지고 토라 주석과 시와 철학이 발전되었다. 홀로코스트 몇년 후엔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되고, 어두움의 역사로부터 유대인들의 귀환이 시작되었다. 건강 검진이라는 것은 얼마나 빨리 정상으로 되돌아 오는 힘이 얼마나 되는 지를 재는 테스트이다. 그래서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국민이 편히 잠을 잘 수 있도록 리더들은 피로를 감당하며 애를 써야한다. 바로 그것이 리더들의 정신 건강 검진이며,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이 일은 스트레스가 쌓이고 피곤한 일이다. 토라에 모세, 엘리야, 예레미야, 요나 같은 출중한 선지자들은 이 일을 계속하기 보다는 죽고 싶다고 부르짖었던 사람들이다.  아브라함도 깊은 우울증에 시달였고 처칠도 마찬가지였다. 간디와 마틴 루터 킹도 사춘기에 자살을 시도했던 경험이 있고 미켈란 젤로, 베토벤, 고호 같은 예술가들도 평생 우울증상에 시달렸다. 위대함이 절망의 순간으로 이끌어 가는 것인지, 위기의 순간이 위대함으로 이끄는 지는 정확한 답을 제시할 수 없을 지 모른다. 

사실 야곱은, 위기의 순간에 차분하게 대응했던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달리 우리처럼 감정적으로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다. 두려워 했고, 외로워 하고 사랑하고, 다른 조상들보다 방랑의 시간이 길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국, 야곱을 견디어내고 존속하였다. 그는 창세기의 수 많은 인물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생존자이다. 탈무드는 생존하고 회복하는 능력이 바로 리더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라고 평가한다. 바로 위험이 도사린 삶을 기꺼이 살아내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루스벨트가 말했던 것처럼 위대한 리더는 비판하거나, 앞에선 사람을 지적질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 그 현장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며 부족함과 실패를 안고서 마지막에 성취를 이루어내는 사람들이다. 설사 실패한다하도, 그들의 실패는 결코 현장에 발을 들여 놓지도 않은 뒷짐진 방관자들의 삶과는 차원이 다르다. 

잃어 버린 아들 요셉과의 만남
잃어 버린 아들 요셉과의 만남

야곱은 경쟁심으로 불타는 에서와, 적의로 가득한 라반을 견디어냈다. 여러 아내들과 배다른 자녀들 사이의 긴장과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을 일찌감치 감내해야 했다.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20여년이나 안고 살아야 했다. 그가 이집트의 왕 바로를 만났을 때 ‘거친 인생을 살았다’ 고 말 할만큼 굴곡진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불안한 삶의 여정에는 천사를 만나고,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고, 거기에 함께하는 확연한 하나님의 존재 확인이 늘 있었다. 

탈무드는 도전하고, 넘어지고, 두려워 하면서도, 계속 그 길을 가는 것이 좋은 리더가 되는 덕목이라고 강조한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이름을 태동하며, 우리의 생각과 달리 유대인의 리더로 인정받는 이유이다. 두려움과 위기의 순간에 거기 항상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된 까닭이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소망과 능력의 원천은 취하는 자의 몫이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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