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에서는 11월을 위령성월(慰靈聖月)로 정해서 세상을 떠난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나이 들면서 주위의 아는 분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지켜보며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생각하게 된다. 

대구 교구청 성직자묘지 입구 문의 양쪽 기둥에는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뜻의 라틴어가 붙어있다. 글의 의미는 시간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니 그 중간인 현재, 오늘을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매일 맞이하는 하루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11월에는 잊지 못할 아름다운 기억 하나가 미소와 함께 살짝 떠오른다. 모처럼 한가로운 주말의 하루, 친구처럼 지내는 메리 수녀님이 함께 축하해줄 일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해서 무조건 따라나섰다. 인생의 황혼길에서 사랑에 깊이 빠진 80세 영국인 할아버지 신랑과 71세 호주인 할머니 신부의 러브스토리를 알게 된 날이다. 노부부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의 풍경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니 떠오른다. 나이든 신랑 신부의 결혼식을 축복하는 듯 성공회 교회의 둥근 지붕 위로 11월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한 교회는 120여 년의 세월을 간직한 채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그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교회 마당 한 편에는 하얀색 리무진이 신랑•신부의 신혼여행을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고, 하객들도 예사롭지 않은 이 결혼식을 들뜬 표정으로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하는 결혼행진곡이 웅장하게 울려 퍼지자 신랑 신부의 입장이 시작되었다. 할머니 신부는 우아해 보이는 남청색 드레스로 단장하고 손에는 작은 부케를 들고 키가 후리후리한 멋쟁이 노신사의 팔짱을 끼고 입장했다. 나이 지긋한 신랑 신부의 결혼식임을 말해주는 듯, 대부분 하객은 백발의 노인들이었다. 그리고 모두의 얼굴에서는 부러움과 놀라움이 뒤섞인듯한 묘한 표정들을 짓는 듯 보였다. 

외교관 출신인 신랑과 천생연분인 신부는 40여 년 지기 친구였으며 한 번 결혼을 한 경험이 있었다. 두 분은 각자의 배우자를 몇 년 전에 사별했으며 특히 할머니 신부는 중풍과 치매에 걸린 남편을 십여 년간 병간호했었던 훌륭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녀가 없었으며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어느 날, 산책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할아버지가 점심에 할머니를 초대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몇 달에 걸쳐서 구애했으며 결혼에 이르는 멋진 로맨스를 탄생시켰다. 신랑은 신부에게 수많은 사랑의 편지를 보내서 그녀를 감동하게 했으며, 황혼의 아름다운 사랑은 71세의 할머니를 11월의 신부로 만들어 주었다. 비록 두 번째 결혼식이었지만 긴장한 신랑 신부가 좌석을 바꿔 앉아서 하객들의 웃음을 터트리게 했다. 그들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사랑이란 나이가 들어도 서로를 배려해줄 수 있는 진실 된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식이 끝난 후에 너무나 행복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는 신랑 신부에게 축하의 악수를 하며 진심으로 행복한 여생을 함께 누리기를 빌어 주었다. 참으로 귀한 인연의 만남이니 두 분 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시라고... 그러나 아들딸 많이 낳고 다복하게 살라는 덕담(?)만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환하게 웃음 짓던 신랑과 수줍은 미소를 짓던 신부의 모습이 내 마음에는 여전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요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한 시절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불렸던 고(故) 이어령 선생을 기억해본다. 죽음을 앞두고 가진 제자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 나는 이제부터 자네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네. 이 모든 것은 내가 죽음과 죽기 살기로 팔씨름을 하며 깨달은 것들이야. 어둠의 팔목을 넘어뜨리고 받은 전리품 같은 것이지.” 또한 “신과 생물의 중간자로 인간이 있기에 인간은 슬픈 존재고 교만한 존재지, 양극을 갖고 있기에 모순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어.”라는 말을 남겼다. 

귀한 울림을 세상에 전하고 떠나신 분이 안식을 구할 수 있도록 영혼이 위로받는 달, 11월에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는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 같은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이제 한 달여 남은 올 한해를 잘 마무리할 수 있다면 좋겠다. 선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분들의 영혼은 아름다운 무지개 색깔로 채색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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