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알다시피 우리와 같이 영어 외래어를 많이 쓰는 나라다. 명치유신 이후 서구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 외래어가 많지만 2차 대전 패망 전 극도의 사회 혼란 속에 굴러다니던 그런 말 가운데 지금도 기억나는 두 개가 ‘데마’와 ‘센덴 삐라’다. 

전자는 영어 Demagogy에서 나온, 우리말로 하면 정치적 선동용 유언비어(流言蜚語)나 흑색선전, 요즘 쉽게 쓰이는 말로는 가짜 뉴스가 될 수도 있겠다. 후자의 센덴은 선전(宣傳)의 일본어 발음이고 삐라는 영어 Bill에서 유래한  것이다. Bill은 여러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탈북민 단체가 북으로 날려 보냈던 선전용 전단지가 바로 그것이다. 

패전 전 여러 데마 가운데 하나는 미군이 상륙하면 어린이들 눈을 뽑아 진흙으로 채운다든가 처녀들은 모두 데려다 강간을 한다는 류였다. 그때 미군에 맞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기를 독려하는 암암리 선동이었다. 

왜 흑색전선이니 유언비어가 아니고 굳이 데마니 선전 삐라인가? 전 정권에서 보안 계통 고위직에서 오래 종사한 분이 최근 유튜브에 나와 이태원 참사의 배후는 중국을 거쳐 하는 북한의 소행이고, 또 그런 과정에는 중국을 거쳐 들어오는 마약이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때 어려서 느낀  섬뜩한 기분이 떠올라서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정권 아래 마약 사범이 5배로 늘었다고 한다. 

국민적 각성

나는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더욱 국가 국가기밀 문서를 만져볼 수 있는 자리에 있어 보지 않아 ‘좌파 배후설’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사회과학을 한 사람으로서 판단하기는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 모여 158명이나 밟혀 죽었다면 그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고 거기에 우리 민족의 정치사회문화 수준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목하 진행 중인 치안 담당 공무원들에 대한 문책과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보상 시비가 마무리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내가 보는 더 중요한 건 사고의 숨은 원인들을 찾고 재발을 막는 방안에 대한 국민적 합의다.

영미인들이 잘 쓰는 말로 ‘국민적 소울 서칭(Soul searching)’이 이에 해당될까. 우리말로 하면 긴 시간을 두고 하는 대대적인 국민적 석고대죄(席藁待罪)라할까 각성 운동이다. 이번과 같은 사고는 사회풍토와 무관할 수 없는데 어느 국민이 ‘오불관언(吾不關焉: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남의 일에 무관심하거나 간여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이르는 말)이요’라고 말할 수 있겠나. 

과거 중고교 시절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면서 근인(近因)과 원인(遠因)이란 말을 썼었다. 이러한 접근법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사회과학적이다. 사회과학 정의를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다. 내가 강조하는 한 가지는 현상의 원인 변수를 될수록 많이 분석에 넣는 것이다. 눈에 쉽게 보이는 가까운 원인만 놓고 시비를 벌인다면 그건 과학적이 아니다.

1960년초 설 귀성객들이 서울역 3번 계단에 몰려 내려가다가 인파에 눌려 31명이 몰사한 사건은 상당 부분 빈곤과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치안 인력 부족, 낙후된 역 시설, 먹고 살기 위해 상경해서 지내던 가난한 시골 출신 등 요인들이 그랬다. 역설적으로 이번에는 우리가 너무 쉽게 구가(謳歌)하는 나라의 풍요가 상당 부분 악마 노릇을 했다고 말하고 싶다. 지나친 물질과 놀이문화 중심의 사회 풍조다. 한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외국 기자의 풍자를 들은 지 한참 되었지만 놀이문화에 관한 한 지금도 맞다고  본다. 

일부 잘 사는 사람들의 물질 소비와 놀이문화를 보면 한국은 후기산업사회시대인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이 아직도 매달리는  성장이론의 원조인 케인즈 경제(The Keynsian economy)는 고도성장에 수반하는 빈부격차와 비리 등 사회문제, 대형 사고, 기후변화 등의 후유증에 대하여는 언급한 바가 없었다. 20대가 주로인 이태원 참사자들 가운데는 놀러 다닐 수 없게  어려운 가정 자녀들도 많았을 것이다. 사회풍조가 그러니 또래를 따라 그런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건 당연하다. 부모들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위에서 한국 대신 한민족이란 말을 썼다. 우리 사회의 풍토를 개선하는 데는 한국의 한국인만이 아니라 점점 일일권에 흡입되고 있는 전 세계 한인들도 빠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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