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살갗에 내 살이 닿게 걷는 것을 ‘어싱(earthing)’이라 한다. 이렇게 접지할 때 땅 속 깊은 곳에서 뿜어내는 기운이 내 몸으로 옮겨오는 기분이다. 흙을 못 밟고 살아가는 일상에서 얻게 된 독소를 자연 속 기운과 맞바꾸는 느낌이랄까. 사년만에 방문하는 한국에서 고향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 맛을 간직하고파 신발을 벗어들었다. 옛부터 어르신들이 ‘사람은 흙을 밟고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그 말이 생각나서가 아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좋은 계절, 가을에 나는 그렇게 또 맨발로 땅을 만났다. 고개를 들면 하늘은 주황빛 풍경으로 그득하게 메워져있다. 호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형형색색 단풍잎들이 나들이를 하려는지 잘 차려입은 모양으로 나를 반긴다. 두 눈은 아름다운 색깔에 온통 빼앗겼지만 발바닥에 닿는 촉촉한 감촉은 전신으로 퍼져옴을 느낀다. 태어나고 자란 땅에서 나오는 기운이 어린 시절을 이 곳에서 보낸 내 몸에 전달되니 그 안온함이란 엄마 품 그 자체다. 같은 흙, 물, 언어를 다시 만나니 나도 모르게 몸 속 무의식이 먼저 알아보고 무장해제가 되나보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네 손이 이젠 따뜻하네’ 하며 좋아한다. 이민 생활에서는 한 여름에도 반갑다고 손을 내밀면 ‘앗! 차거워’ 하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잡았던 손을 바로 빼게 만들곤 했었다. 몇 달 전 호주에서 ‘어싱’을 처음 시작한 것은 우연이었다.

1845년에 지어졌다는 건물, 커스텀즈 하우스(The Customs House)로 들어선다. 내부 분위기는 겉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과거에는 관세청이었다가 현재는 시민들을 위한 공간인 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 층을 올라가 방으로 들어가면 한국책들로 꾸며진 서재가 나오는데 여러 해를 들락거렸어도 매번 반갑다. 

이번엔 박범신의 장편소설 ‘고산자’를 뽑아들었다. 시드니에서 이 건물이 지어질 비슷한 시기에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느라 조선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었다. ‘발자국조차 빠르게 지워지고 없으니, 좀전에 그곳까지 뒤쫓아온 삽살개는 환영이었던 것 같다.’ 라는 구절을 보는 순간, 갑자기 바다가 떠올라 읽던 책을 덮고 선착장으로 향한다. 배로 이십여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바닷가 모래사장 위를 신발이 아닌 맨발로 꾹꾹 눌러 발자국을 남겨본다. 이미 그려진 지도의 가장자리임을 느끼며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다. 겨울 날씨라 젖은 모래에 닿는 발바닥은 차갑지만 등뒤로 내려 쪼이는 햇볕은 따사롭다 못해 안방 구들처럼 따끈해온다. 왕복걷기 두어번째 접어들 무렵, 거세게 불어온 파도에 발자국조차 빠르게 지워지고 무릎까지 적셔지니 기껏 접어올린 바짓단이 무색해진다. 

옷까지 젖은 김에 아예 바닷물 속에 발을 담그고 밀려나가는 파도를 멍하니 바라본다.

삼십여년 전 이곳에 나란히 서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함께 바라보았던 친정 아버지가 곁에 있는 듯, 그의 목소리는 내 귀에 쟁쟁하게 남아있다. 한국 출발 전 세계지도를 거실에 붙여 놓고 시드니 해변가에 압정을 꽂아 표시해 놓았는데 ‘지금 그 점 위에 내가 서 있네’ 하셨다. 드디어 딸이 사는 남반구에 와 있다는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얼마 전 이제 당신 몸은 흙으로 돌아갔으니 만날 수 없고 남겨진 목소리만 기억 속에서 듣는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발자국은 오래 전 파도에 지워졌지만 그 때 그 모래일까 싶어 자리잡고 앉는다. 옆을 보니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아빠가 모래 웅덩이 속에 함께 들어앉아 있다. 온몸이 모래범벅이 되어 바닷물이 밀려오면 그 촉감에 깔깔거리는 모습에 한참 정신을 빼앗겼다. 나두야 하고 용기내어 모래장난을 시작한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모래밭에서 어린시절처럼 한 손을 묻어 다른 손으로 쌓아 두드리며 모래집을 짓는다. 겨우 지어놓은 집이 순식간에 파도에 쓸려 나간다. 위치를 안전한 곳으로 조금 옮겨 앉아 또 왼손을 깊숙히 묻고 부지런히 오른손으로 더 높고 탄탄한 집을 짓는다. 육십여년 넘게 사용했던 헌 집을 주고 이제부터 살아 갈 새 집을 얻어 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밀물과 썰물로 새로이 생성되는 오늘의 바닷물과 모래가 어제의 그것과 다르듯이, 2023년 새해에는 맨발로 밟게 될 모래사장에서 고향 땅의 힘찬 기운까지 더해져 발끝에서 머리 끝까지 채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차수희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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