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낚시터를 찾은 강태공을 태우고 수상 좌대로 향하는 보트
 아침 일찍 낚시터를 찾은 강태공을 태우고 수상 좌대로 향하는 보트

설악산과 동해안에서 한국 풍경에 흠뻑 젖어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호주에서 원했던 목적을 대부분은 달성했다. 설악산을 떠나 서울로 돌아간다.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등산복 차림의 청년 한 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빈 차로 도착한 버스는 두 명의 승객만 달랑 태우고 떠난다. 청년마저도 등산객으로 붐비는 다음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손님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버스가 경사와 커브가 심한 도로를 따라 계속 산을 오른다. 버스에서 내려다보는 설악산 풍경이 일품이다. 운전하는 기사도 풍경에 반해서일까. 도로변에 잠시 버스를 세우고 핸드폰에 설악산 풍경을 담는다. 설악산이 명산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버스가 산에서 내려와 마을이 있는 정류장에 도착했다. 승객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서울에 가까워지면서는 버스는 속도를 내지 못한다. 출퇴근과 관계없는 이른 오후지만 도로는 자동차로 넘쳐난다. 한가한 시골 생활에 익숙해서일까. 이제는 복잡한 도시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니 자신이 없다. 

과거를 보려고 수많은 사람이 산을 넘었다고 하는 문경새재 과거길
과거를 보려고 수많은 사람이 산을 넘었다고 하는 문경새재 과거길

다음날은 친척을 찾아 나섰다. 청주에 사는 친척이다. 오래전 청주에서 지낸 적이 있으나 지금은 그 당시 살던 곳은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했다. 여느 대도시와 다름없이 많은 아파트와 자동차로 붐빈다. 친척은 평수가 넓고 분위기도 좋은 아파트에 산다. 그러나 서울 아파트 가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하다고 한다. 복잡한 서울에 사람이 몰리는 이유를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직장, 아이 교육 등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다음날 친척과 함께 문경새재 도립공원을 향해 떠난다. 시골길이지만 도로는 잘 포장되어 있다. 산을 돌고 돌아 도립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니 지역 특산물을 풍성하게 진열한 가게가 도로에 줄지어 있다. 한국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소나무와 정자가 친구가 되어 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소나무와 정자가 친구가 되어 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쾌청한 날씨다. 호주에 살면서 한국에 미세먼지가 심하다는 뉴스를 자주 들었다. 그러나 요즈음 쾌청한 가을 하늘이 계속되고 있다. 바늘로 콕 찌르면 비췻빛 물이 쏟아질 것 같은 한국의 가을 하늘이라는 글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읽었던 글이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도립공원 입구에는 전기 자동차가 줄지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야 더 많은 것을 보고 자연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 호주에서 만났던 젊은 의사가 떠오른다. 한 달 정도 호주 시골길을 걷기로 했다며 민박하는 우리 집을 찾았던 의사다. 호주를 여행하다 보면 걸어서 혹은 자전거로 몇 개월씩 여행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나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유별난 여행객들이다.

문경새재 산책로는 걷기 편하게 잘 닦여 있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숲속에 조성한 흙길이다. 아스팔트나 인공적으로 조성하지 않아 마음에 든다. 흙을 맨발로 밟는 것이 몸에 좋다고 생각해서일까. 신발을 벗어들고 걷는 사람들도 간간이 보인다.

한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물레방아
한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물레방아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고개를 오른다. 한눈에 보아도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오래된 정자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정자 옆에는 온몸을 비틀며 삶을 버텨내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오래된 정자와 소나무가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는 모습이다. 

주위와 조화를 이루며 떨어지는 아담한 폭포 앞에 잠시 머문다. 한국의 물레방아를 카메라에 담기도 한다. 시냇물 옆에 오손도손 모여 앉아 음식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오래전 한국에서 살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경새재 과거 길’이라 쓰인 바위가 보인다. 과거를 보려고 수많은 사람이 오르내렸던 산길이다. 소나무가 울창한 입구에 ‘마당바위’라 불리는 널찍한 바위가 있다. 이곳에 도적들이 숨어서 지나가는 사람을 덮치기도 했다는 설명서가 있다. 과거 보러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책로에는 ‘금의환향 길’이라고 쓰인 바위도 있다. 과거에 급제하고 고향에 돌아갈 때도 이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시험에서 성공하지 못한 많은 사람도 이 길을 걸어 고향으로 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과거 시험과는 거리가 먼, 하루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보따리를 들고 이 길을 걸은 사람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무슨 길이라 불러주어야 하나.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숲속을 걸어 산등성이에 올랐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공원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 되돌아 내려간다. 어느 정도 걸으니 공원 입구에서 보았던 친환경 전기 자동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전기로 운행하기 때문에 매연 공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에서 나오는 음악은 소음 공해다.

가을로 뒤덮인 산책로를 찾아 걷는 사람이 많다.
가을로 뒤덮인 산책로를 찾아 걷는 사람이 많다.

도립공원 입구에 다시 도착했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린다. 사과 축제를 위한 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정취가 물씬 풍기는 가요를 가수(?)가 멋들어지게 뽑아내고 있다. 사과는 대구가 주산지라고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주산지가 문경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을 비롯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니.

오늘은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같이했던 지인을 만났다. 낚시를 좋아하는 지인은 낚시터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수상 좌대를 예약했다고 한다. 자동차를 타고 가며 지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가을로 접어든 산길을 돌고 돌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저수지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곳에는 20여 개의 수상 좌대가 있다고 한다.

호주에서 바다낚시는 가끔 하는 편이다. 한국에서도 붕어 낚시를 해본 적이 있지만 기억이 아물아물하다. 보트를 타고 좌대에 도착했다. 지인은 능숙한 솜씨로 서너 대의 낚싯대를 설치해 준다. 수심에 맞추어 찌도 조절해 주었다. 서너 대의 낚싯대를 걸쳐놓고 붕어를 기다린다. 세월을 낚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산을 찾으면 호주와 달리 대부분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좋다.
한국에서 산을 찾으면 호주와 달리 대부분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좋다.

예상대로 나의 낚싯대는 조용하지만, 지인의 낚싯대는 바쁘다. 산속에 둘러싸인 호수다. 저녁이 되면서 기온이 떨어진다. 두툼한 점퍼로 무장해야 할 정도로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하다. 드디어 나도 한 마리 잡아 올렸다. 나에게 걸려 나온 붕어가 제일 크다. 한마리밖에 잡지 못했지만 그래도 금메달감이다. 

아침에 호수를 바라보니 물안개가 환상적이다. 공포영화에 나오는 현실같지 않은 풍경이다. 낚시보다는 주위 풍경에 매료되어 사진 찍기에 바쁘다. 이른 아침에 온 낚시꾼을 태운 배가 안개 자욱한 호수위를 그림같이 흘러간다. 한마리밖에 잡지 못했으나 손맛에 대한 미련은 없다. 한국의 아름다운 풍경이 마음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한국 방문을 끝내고 비행기에 오른다. 호주에 가면 만날 이웃들이 떠오른다. 바로 옆집에는 이탈리아 사람이 살고 있다. 베란다에서 눈을 마주치면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아랫집 사람은 폴란드 사람이다. 가끔 만나 식사를 나누는 이웃은 독일 사람이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고마운 이웃은 영국 사람이다. 그리고 이웃들은 나를 한국 사람이라고 부른다. 모든 호주 국적을 가진 호주사람이지만.

비행기에서 내리면 호주 땅이다. 이웃들은 한국 방문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할 것이다. 호주에 살지만 한국 사람으로의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산책로에서 만난 정겨운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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