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숱하게 경험한 송구영신의 기억에는 철학자가 아니라도 매년 나를 불가사의의 사유(思惟) 속으로 몰아들이곤 했다. 

특히나 1999년 12월 31일, 23시 59분에서 2000년 1월 1일 0시로 바뀌는 그 1초의 남은 시간은 1900년도의 마지막 순간이었고, 2000년대로 뒤바뀌는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마치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라도 하듯 내 마음은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처럼 긴장된 순간이기도 했다.

아닌게아니라 이즈음 사람들의 들뜬 마음상태를 반영이라도 하듯 괴상한 유언비어도 한몫 했다. 가령, 국가 전산망이 오작동으로 인해 전기공급이 멈출 수 있다는 귀띔, 지구의 종말이 시작되며 환란의 때에 대비해서 식량과 식수를 많이 비축해 놓으라는 귀띔들은 하도 은근하여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반신반의 하면서도 점점 그 귀띔에 말려들어 슬그머니 라면 몇 박스와 쌀 한 자루며, 생수와 양초까지 챙겨놓은 상태였다.  

나는 가족들과 TV 앞에 둘러앉아서 역대 최대의 규모로 쏴 올린다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서, 마치 2000년을 불러오듯 카운트다운을 조여 드는 마음으로 세고 있었다. 드디어 남은 그 1초의 시간에 축포가 터지기 시작했다. 막상 2000년으로 들어선 ‘Happy New Year!’ TV 속에서는 군중들이 서로 끌어안고, 얼굴들을 비벼대고, 펄쩍펄쩍 뛰는 흥분의 도가니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뭔가 속은 것 같은 허탈감에 바람 빠지는 미소를 흘리면서 가족들과 새해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달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인류의 역사 속에 지구를 거쳐간 수많은 인류들 중에서 서기(西紀)를 표기하는 네 자리의 숫자가 몽땅 바뀌어 버리는 순간을 경험한 지구인들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천 년의 마지막 세기와 또 다른 천 년의 시작을 경험한 나의 감회는 그래서 의미가 깊을 수밖에 없다.

내가 시간을 부여잡고 끌려가며 치열하게 살던 시절은 20세기와 함께 한국에 있다. 늘 무엇인가 계획하고 결정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시계는 나를 지배하고 멈추지 않았다. 돌들 틈을 굽이쳐 흐르는 계곡물처럼 쉬어갈 틈도 없는 치열하게 살아온 삶이었다. 그 흐름 속에 부딪히고, 감싸며 비껴간 크고 작은 돌들은 사랑이었고, 아픔이었고, 희망과 좌절들이었다. 그 모든 순간의 삶, 다만 목표만을 향해 질주했던 삶, 운명에 대들던 삶들을 다 흘려 보내고 나니 이제 나는 자그마한 연못이 되어있다. 바로 노인이 되어있다.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우스개 말처럼 ‘똑딱’의 시간과 ‘꼴깍’ 하고 숨 넘어가는 시간은 동시간 1초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이제 어언 2023년이다. 그렇게 기대를 걸고, 호들갑까지 떨면서 맞은 2000년은 지나간 1000년대와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세월이었다. 창세이래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변함없는데,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세월에 변화를 만들어내는 건 피조물인 인류가 아니던가.

이제서야 나는 철이 드는 것일까. 해가 바뀌어도 별다른 감회를 느끼지 못한 지 벌써 오래다. 새해에 들어섰다 해도 나의 생활 패턴에는 변한 게 없다. 묵은해에 살던 집에서, 묵은해에 입었던 옷을 입고 있고, 묵은해에 먹었던 음식도 그대로다. 나의 하는 일 역시 다를 게 없다. 묵은해에서 새해로 이어져 하던 일을 하며 지내고 있다.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일은 세월이 아니라 내 자신이라는 진리다. 이제는 나이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나이를 먹어도 젊고 활기차게 살면, 젊은이일 테고, 젊은이라 해도 희망도 없이 맥없게 살아간다면 그게 바로 늙은이가 아니겠는가.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나의 연못에는 달력이 없다. 끝없는 오늘들만이 모여 있다. 많은 것을 내려놓으니 흘러내려갈 수도 역류할 수도 없이 갇혀있는 물처럼 사는 게 편하다.

하루의 삶으로 만족하고 그 하루를 풍요롭고 알차고 아름답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보내려 한다. 순간에 스치는 기쁨과 행복을 잡을 수 있는 여유로움과 선물로 주어진 책도 많이 읽으며 살련다. 누군가는 노년의 삶에는 슬픔이 가득하다고 말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릴 때 부모님의 품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해맑게 놀던 시절이 노년에 다시 주어졌다는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작은 연못수면에 하늘을 가득 담은 광경을 감상하며,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들과도 사귀어 보리라. 그리고 나의 연못에서 지혜롭고 너그러운 연꽃 한 송이를 피워내고 싶은 것이 2023의 내 희망이다.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