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에서 바라보며 황홀감에 젖었던 깃털 구름.
산속에서 바라보며 황홀감에 젖었던 깃털 구름.

부담 없이 이곳저곳 끌고 갈 수 있는 자그마한 캐러밴을 가지고 있다. 애지중지 집에만 모셔둘 수 없다. 애완견을 핑계로 산책하는 사람처럼, 캐러밴을 핑계로 집을 나서게 된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문득 허블우주망원경에 얽힌 이야기가 떠오른다. 엉뚱한 천문학자의 제안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우주 공간에 망원경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뜻밖에 수천 개의 은하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다.

나에게도 엉뚱한 생각이 떠오른다. 그동안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곳을 위주로 다녔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장소를 가보기로 했다. 혹시 아는가. 나만의 볼거리를 만날 수도 있을지. 가을의 문턱이라고 할 수 있는 3월이지만 아직도 더운 날씨다. 많은 사람은 시원한 바다를 찾아 나선다. 나는 사람들 발길이 뜸한 산속에 있는 작은 야영장을 목적지로 정했다. 

수량이 적어 볼품없는 작은 폭포.
수량이 적어 볼품없는 작은 폭포.

지금까지는 시설 좋은 야영장에서 주로 지냈다. 그러나 이번에 가는 야영장은 빗물을 받아 마실 정도로 외진 곳이다. 불편한 점이 많을 것이다. 일단 식수를 자동차에 싣는다. 물이 맞지 않으면 고생할 것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생필품도 필요 이상으로 챙겼다. 근처에 있는 동네 월카(Walcha)에서도 많이 떨어진 장소다. (영어 단어만 보면 ‘왈차’라고 읽어야 할 것 같은 가는 데 사람들은 월카라고 발음한다.) 

집을 나선다. 길에 비포장 산길도 있다고 한다. 조금은 걱정된다. 그러나 비만 오지 않으면 다닐 수 있는 도로라고 들었다. 자주 다니던 고속도로를 따라 1시간 이상 운전한 후 내륙으로 들어가는 국도로 핸들을 꺾는다. 높지 않은 봉우리가 줄지어 있는 풍광 좋은 시골 도로가 계속된다. 

차창 밖으로 들판에 물을 주는 거대한 기계(?)가 보인다. 무슨 농사를 짓는 것일까.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오지에서 예상 밖이다. 조금 더 운전하니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네도 보인다. 국도를 벗어나 좁은 산길로 들어선다. 작은 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교회임을 직감할 수 있다. 정원이 잘 꾸며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다. 

산책로에서 만난 희귀한 버섯.
산책로에서 만난 희귀한 버섯.

목적지에 가까워지면서 염려했던 비포장도로를 만났다. 처음에는 갈만했으나 숲으로 들어서면서 도로가 험해지기 시작한다. 가끔 자동차에서 내려 도로를 살펴보아야 할 정도로 길이 험하다.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이 캐러밴을 끌고 가기에는 쉽지 않은 도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운전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야영장에 들어서자 주인이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부부가 살면서 야영장과 숙박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시드니에 살다가 20여 년 전에 산이 좋아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개성 있는 삶을 선택한 부부다. 예상했던 대로 손님은 거의 없다. 숙박시설에서 지내는 부부가 손님의 전부다.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에는 최고의 장소다.

늦은 오후가 되면서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너른 야영장 잔디에서 포도주잔을 앞에 놓고 무념(無念)의 시간을 보낸다. 파란 하늘이지만 검은 구름이 간간이 지나가며 비를 뿌리기도 한다. 검은 구름이 지나간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흘러간다. 수많은 새가 날갯짓하는 모습이다. 하늘에 시선을 자주 보냈다면 집에서 볼 수도 있는 구름이다. 그러나 일상에 파묻혀 지내는 평상시에는 하늘 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혼자 독차지한 야영장. 인기척이 없으면 작은 캥거루들이 뛰어노는 잔디밭이다.
혼자 독차지한 야영장. 인기척이 없으면 작은 캥거루들이 뛰어노는 잔디밭이다.

전화와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는 격리된 곳에서 보내는 나만의 시간이다. 하늘에 시선을 주고, 숲과 하나 되어 과거의 생각이나 미래의 걱정에서 벗어난다. 현재만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다. 부러움 없는 삶이란 이런 것인가, 야영장을 운영하는 부부의 해맑은 표정이 떠오른다.

산골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잠자리 들기에 이른 시간이지만, 주위는 이미 어둠에 잠겼다. 일찌감치 침대에 들어가 눈을 감는다. 새들이 적막을 깨고 있다. 집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새소리가 대부분이다. 알 수 없는 동물들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린다. 

어두움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이다. 밖으로 나오니 인기척에 놀란 작은 캥거루들이 숲으로 도망가기에 바쁘다. 왈라비(wallaby)라고 불리는 작은 캥거루보다 더 작은, 토끼보다 약간 큰 캥거루 떼가 밤이면 잔디에 나와 지내는 것이다. 새벽을 즐기던 캥거루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든다. 

오늘은 산책로를 걷기로 했다.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라고 한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길로 들어선다. 길이 가파르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한 걸음씩 내디딘다. 폭포가 있다는 이정표를 따라가니 작은 계곡이 나온다. 폭포라고 부르기에는 규모가 작은 계곡이다. 그래도 물이 많이 흐르면 나름대로 멋진 풍경을 자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숲에는 수많은 고목이 자라고 있다. 
숲에는 수많은 고목이 자라고 있다. 

폭포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는데 특이한 돌멩이로 보이는 것이 길옆에 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니 돌멩이가 아니다. 버섯이다. 이런 모양의 버섯을 본 기억이 없다. 독버섯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손쉽게 구하지 못하는 귀중한 버섯일 수도 있겠다. 산책로 주변에는 고사리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고사리 철에 오면 손쉽게 한 바구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도로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나무에 둥지를 튼 이끼도 눈길을 끈다. 초록색이 유난히 선명한 이끼다.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니 건너편에서 지내던 부부가 짐을 꾸린다. 떠난다고 한다. 잠깐 인사만 나눈 사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헤어졌다. 지금부터 야영장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기대하지 않은 호강을 누리게 된 것이다.

다음 날도 산책로를 걸었다. 주위를 압도하는 높은 고목이 눈에 들어온다. 큼지막한 몸통에 커다란 옹이(상처)가 있다. 주위에 있는 고목들도 자세히 보니 거의 모든 나무가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커다란 가지가 잘려 나간 상처가 보인다. 밑동이 크게 손상된 나무도 있다. 그러나 고통을 딛고 일어나 지금은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과시하는 고목들이다. 하긴 상처 없는 삶이 있을까. 모든 삶은 나름의 어려움을 겪으며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남아돈다. 책을 읽는다. 음악도 듣는다. 의자에 앉아 멍때리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촌음(寸陰)도 아껴 쓰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으며 지낸 학창 시절이다.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라면 목표를 세우고 바쁘게 지내야만 해야 하는 것일까. 주어진 하루하루를 화초 가꾸듯 보듬어 나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나만의 삶으로 채워나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물주는 기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물주는 기계.

이곳에서는 식사도 제공한다고 한다. 떠나기 전날 저녁 식사를 주문했다. 식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인 부부와 함께 앉아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자식은 딸만 한 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딸이 한국어를 공부한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꼬리를 문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음을 피부로 느낀다. 아무런 기대 없이 찾아온 야영장이다. 기대가 없어서일까, 기대 이상으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수도사를 뜻하는 몽크(Monk)의 어원은 ‘홀로’라는 그리스어(monachos)에서 유래한다고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외부와 단절된 곳에서 홀로 지냈다. 수도사 아닌 수도사 생활하며 며칠 지낸 것이다. 그 덕분에 삶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바뀌었다는 기분이 든다. 

허블우주망원경처럼 새로운 은하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각도에서 나의 삶을 조망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수도사처럼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는 신비스러운 존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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