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유난히 괴로워 잠을 설치고 아침잠에 곯아떨어졌었나 보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강한 빛줄기에 눈이 부셔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웬 흔들의자가 얌전히 놓여 있다. 이상한 일이다. 어젯밤 느닷없이 흔들의자 타령했더니… 혹시? 뭐든지 사 들고 들어올 때마다 옛날 옛적 양반들 ‘이리 오너라’처럼 “여 좀 나와 봐라. 이거 좀 받아라.” 요란스러운 영감이 웬일이지? 생일 선물인가? 그럴 리가? 뭔가 계속 이상하다. 

30여 년 전 이민해 오기를 꺼렸던 나를 영감이 온갖 달콤한 얘기로 꼬드겼다. “니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흔들의자에 앉아 니 좋아하는 책이나 읽고 그림 실컷 그리고 여행이나 다니면 된다.”라고. 그걸 곧이들은 건 아니지만 20년 세월 동안 쇼핑센터에서 사업을 한다고 가산을 탕진해서 얻은 건 골병뿐이다. 최근 불현듯 울화가 치밀어 “흔들의자는 언제 사 주는 거야?” 하고 앙탈을 부렸는데 무슨 말이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되받아치던 영감이 마음이 켕겼는지 묵묵부답이었다. 

문득 창밖을 보니 옆집 데이비드가 우리 마당에 들어와 우리 영감이랑 아침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데이비드가 내게 흔들의자에 앉아 보라고 권했다.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면서. 깜짝 놀라 어리둥절한 상태로 앉아 보았다. 어쩜 나에게 꼭 맞는 아담한 흔들의자였다. 크기며 디자인이며 내가 원하던 것 이상으로 이름다운 작품이었다. 우아! 나는 자다가 부스스 산발하고 나온 내 모습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마구 비명을 질러 댔다. 감동과 감격에 겨워 흥분이 가라앉질 않는다. 내가 매일 의자에 앉아 일광욕하는 걸 눈여겨보았었나 보다. 그는 이 의자가 “네 허리 아픈 데 도움이 될 거다”라고 했다. 

향기로운 나무를 가지고 기계가 아닌 손 연장으로 다듬은 공예 작품에 금방 반해 버렸다. 미술을 전공한 내가 보아도 빼어난 솜씨였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왜 내게 그런 귀한 선물을 주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얼마 전 데이비드에게 이사를 환영한다는 의미로 와인 한 병 건네며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인데….

이전에 그 집에 살던 셴은 일가친척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었다. 예의 바르고 상냥한 중년의 환자가 이삿짐도 가구도 없는 텅 빈 집 적막한 마당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어 보니 그는 발에 붕대를 잔뜩 감아 걷지 못하면서도 무척이나 명랑한 사람이라 놀랐다. 내가 다리 통증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울부짖고 신음하며 뒹굴던 시기였는데, 셴이 아침마다 내 안부를 물어봐 주는 게 내심 위로가 되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어쩌다 마주치면 얼마나 반가웠던지. 동병상련 환자들끼리의 측은지심이었을까. 내 상태가 조금 호전되자 자꾸 셴에게 마음이 쓰였다. 우리 영감이 우유, 빵 등 먹거리를 사다 줘 먹을 게 조금이라도 생겼다 하면 나는 셴의 몫을 챙겼다. 때로는 음식도 만들어 가져다주었다. 내가 제일 쉽게 할 수 있는 건 달걀을 삶아서 보내는 거였다. 주부가 장장 1년을 누워 있으니 교회에서 음식을 보내 주기도 했다. 나는 셴에게 구세군(Salvation Army)에서 전도한 거라고 말하며 그와 아낌없이 나누어 먹었다. 오래전부터 다리를 앓던 셴은 어느 날 한쪽 다리를 자르고 왔는데도 여전히 명랑해 보였다. 교회에서 보내 준 김밥, 잡채 등 한국 음식을 잘 먹는 그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음식들이 그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웃을 사랑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가 절로 흘러나왔다.

내가 보조기를 잡고 걸음마 연습을 시작할 때면 셴은 손뼉을 치며 응원해 주었다. 어느날 남은 다리마저 잘라 내고 나타난 셴은 여전히 희희낙락했다. 인간 토르소(Torso)가 되자 정부에서 전기 오토바이를 배려해 주어 그는 틈만 나면 혼자 쇼핑을 하거나 돌아다니곤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그랬었는데 어느 날 셴이 죽었단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두 다리가 몽땅 절단되었지만 단단하고 건강해 보이던 중년 남자가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 허무했다.

내가 셴에게 건넨 건 아주 작고 초라한 선의였는데, 아무 연결 고리가 없는 데이비드에게서 분에 넘치게 귀한 선물을 받게 되니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과연 받아도 되는 걸까? 내게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이 기적 같은 에피소드를 연출한 보이지 않는 손길은 침묵 속에서 일하시는 그분이라는 확신이 든다. 아직도 귀에 쟁쟁한 오지 억양으로 “하오 아 유 투다이?” 하던 셴의 목소리가 그립다. 말끝마다 ‘달링’을 붙이는 건 습관적인 것 같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였지만 나쁘진 않았다. 평생 들어 보지 못한 달콤한 달링 소리를 넘치게 말해 주고 떠난 셴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한 줄기 햇살처럼 나를 따스하게 해 준다. 

오늘도 데이비드가 만들어 준 예쁜 흔들의자에 앉아 흔들거리며 짧지만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던 셴을 추억해 본다. 타인에게 보낸 따뜻한 관심과 미소, 위로의 한 마디가 우리의 삶을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워 주고 오래오래 지탱해 준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 작가 소개: 박조향

끊임없이 작업하는 미술가이다. 세상 물정 몰라서 두려울 게 없었던 20대 후반에 싱그러운 단발머리 소녀들과 아름다운 꿈을 꾸며 창작활동에 푹 빠져 강산이 변하는 것도 몰랐다. 40대 중반에 남편과 삼 남매를 데리고 호주에 둥지를 틀었다. 60대 초반에 은퇴하여 시드니 변두리 바닷가에서 물새들을 벗 삼아 독서와 글쓰기로 노년을 아름답고 알차게 꾸며 보려고 애쓰고 있다. 저서로는 2013년에 20여 년 동안 제자들에게 써 온 손 편지 140통을 그림과 곁들여 펴낸 『라일락 향기』가 있다. 『시드니’s 데카메론』의 삽화를 위해 기꺼이 본인의 원화를 제공했다.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수필 7편 연재

최근 출간된 시드니 동포 여성 7명의 수필집인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한호일보 3월3일자 12면 게재)에서 작가와 출판사의 허락을 받고 수필 7편을 매주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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