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기온은 섭씨 30도를 웃도는 한여름인데 실내에선 눈이 내린다?

나는 지금 시드니 시내 State Theatre(주립극장)에 앉아서 수백명의 관람객들과 쇼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다. 무더위에 이름만 들어도 시원한 Slava’s Snow Show 라는 공연 타이틀이 호기심과 기대감을 갖게 한다. 내 앞엔 엄마와 같이 온 남자 아이가 앉아 있고 그 두줄 앞에서는 내 딸이 러시아어를 하는 노부부와 어린 손자가 좌석 찾는 것을 도와주고 있는 중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보이는데 대부분 가족들과 함께 이 쇼를 보러 온 듯 했다. 얼마 후 안내방송이 시작된다. 핸드폰을 끄고 사진과 비디오 촬영은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이제 쇼가 시작 되나보다 했을 때 중국어 안내가 나오고 한국어로 안내를 하더니 러시아어로도 한다. 그제야 나는 이 쇼가 국제순회공연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팬데믹 이후 이 세상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를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일년 전만해도 이 극장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모든 좌석은 텅 빈 상태였다. 지금 내가 좌석에서 내려다 보는 무대의 첫 장면은 황무지처럼 세팅되어 있는데 마치 지난 3년 동안 팬데믹으로 정지되었던 공연 비즈니스를 대변해 주는 듯 보였다. 이 쇼는 ‘슬라바’라는 러시아 사람이 30년전에 시작한 광대극으로서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어왔다는데 지금은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광대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고 한다. 광대는 대화 없이 옷과 분장과 몸의 움직임만으로 관람객들을 웃게도 울게도 한다. 공연이 시작되자 캐릭터들이 황폐한 땅에서 서로 연결고리를 찾느라 왔다갔다한다. 그러던 중에 주연 광대가 목에 걸고 있는 긴 끈이 다른 캐릭터가 들고 있는 끈과 연결되어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모습은 마치 우리가 록다운으로 집콕하는 동안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은 나와서 이런 공연을 보고 있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 휴게시간이 시작되기 직전, 거대한 거미줄이 무대 아래 객석 전체를 덮치며 관객들에게 엉킨다. 나는 메자닌층 좌석에 앉아 이 드라마틱한 광경을 내려다 보며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저 거대한 록다운이란 거미줄 안에 갇혀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록다운이 한창일 때 이사까지 한 우리 가족도 거미줄에 붙잡힌 양 오도가도 못하고 지냈다. 매일 식구들 중 한사람만 가까운 식품점이나 슈퍼마켓에 갈 수 있도록 외출이 허용되어 남편만 밖에 나갔다 왔을 뿐 나와 딸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지내지 않았던가. 

쇼는 엄청난 피날레를 장식함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갑자기 무대에서 소용돌이 같은 흰연기를 뿜어대더니 수백만 개의 하얀 컨페티로 눈폭풍을 일으켜 관객석을 덮치는데 내가 앉은 메자닌층까지도 눈발이 날아들었다. 한여름에 폭설이라니. 이것을 생각해 낸 러시아인 슬라바의 아이디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9년에 완공된 고풍스런 극장 안을 종이조각 눈으로 쌓이게 하다니 어찌 이런 신바람나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해외에 사는 어린 손주들과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작년 12월 초에 다니러 와서 한달반 이상을 함께 지내고 열흘 전에 떠난 아이들이 그립다. 삼년전 팬데믹이 발생하기 바로 전에 왔다간 후 발이 묶였다가 이번에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며 우리들은 여기저기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을 보러 가곤 했다. 손주들과 이 꿈 같은 매직쇼를 함께 봤다면 이처럼 즐거운 추억 하나를 더 만들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관람 내내 들었다. 

사실 나는 이 광대 공연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관객들에게 해석을 맡기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만 광대와 다른 캐릭터들의 표정과 몸짓과 행동이 아이들을 까르르 웃게 했고 어른들도 웃고 박수치게 했다. 그들이 러시아어 노래를 립싱크로 부를 때 두줄 앞의 러시아인 노부부는 손을 흔들고 박수를 크게 치며 좋아하는데 나는 하얗게 칠한 그들의 동그란 입술의 코믹한 움직임을 보고 웃고 있었으니 어쩌겠는가. 

올 여름 날씨는 꽤나 여름답다. 작년 이맘 때 폭우와 홍수가 계속되는 바람에 잃어버린 여름을 보상이라도 하듯 올해는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반갑기까지 하다. 코비드는 여전히 우리들을 위협하고 있지만 이제는 마스크 착용 조차 개인의 의사에 맡겨져 있다.종심(從心)을 넘긴 내가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가 광대 슬라바의 Snow Show를 즐긴 것은 행복이었다. 관람내내 마음껏 웃어댔고 가슴이 철렁하도록 놀라기도 했으니 이 얼마 만에 맛본 즐거움인가. 마치 코비드로 움츠려 지냈던 가슴속의 응어리가 뻥터져 나오듯 속이다 후련했으니..

“엄마 어땠어?”극장을 나오며 딸이 내게 묻는다. “나를 잊고 완전히 어린 시절로 들어가 살다 나온 기분이네.””아~ 그래서 지금 엄마 얼굴이 예쁜 소녀처럼 보이는구나.하하하”딸의 말이 과장인줄 알면서도 나역시 과장일만큼 크게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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