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은 호주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실제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가운데 이민자들이 호주 사회로의 순조로운 융합을 돕기 위한 뜻에서 기획되었다. 노인과 장애인 복지 서비스를 포함, 다양한 서비스 분야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관의 도움으로 이를 잘 극복한 사람들 그리고 자원 봉사자를 포함, 사랑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한인 커뮤니티에서 필요로 하는 내용들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번 주는 치매 진단을 받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딸의 눈을 통해 들어본다 (편집자주).

어머니는 이제 그룹 홈에서 안정을 찾고 잘 지내신다. 
어머니는 이제 그룹 홈에서 안정을 찾고 잘 지내신다. 

자가 고령화 인구 증가로 급증하는 가운데 가족이 감당하기 보다는 정부와 사회가 함께 감당해야 한다는 국가 책임제가 대두되고 치매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부모의 치매로 고민하는 가정이 증가하고 있다. 언어와 문화적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가 더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인 사회에서도 치매 환자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딸 쥴리 씨의 눈을 통해 치매 환자를 둔 가족의 마음을 이해해 본다. 

처음에는 ‘엄마의 갱년기’가 좀 심하게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감정 기복과 함께 많이 예민해지고 무언가를 자주 잊어버리시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 즈음 가족 안에 여러가지 일들이 겹쳐 “엄마가 스트레스를 받아 더 예민해지셨나 보다.. “, 이렇게 생각하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일상적으로 이어지는 대화에 대한 이해력도 많이 떨어지고 이전에 하지 않던 엉뚱한 행동들이 늘어나면서 병원을 찾게 되었다. 

신경과 및 정신과 의사들을 만나면서는 우울증도 의심됐지만 단순히 우울증도 아니었고 치매와는 좀 다르다는 이유로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엄마의 증상은 점점 악화되어 가는데 호주에서 테스트를 한국어로 받지 못하는 현실적인 어려움 등 그 어떤 뚜렷한 방안을 찾지 못한 채 좌절감은 깊어만 갔다. 답답한 마음에 한국에 모시고 가 병원에 입원, 여러가지 테스트를 받고 나서야 결국 치매 진단을 받았다. 병명이 확실해지니 그동안의 답답함은 거두어졌으나 설마 하던 우려가 치매라는 진단 결과로 나오고 보니 그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 답답한 것은 한국에서 받은 진단이 호주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정식 의료 진단 증거가 없어서 국가장애보험(NDIS) 승인을 받는 일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2년동안 세 차례 정도 NDIS 신청을 했는데 그 때마다 거절되었고 결국 응급실에 가고 나서야 치매 진단을 받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그렇게 받기 어렵던 승인이 병원의 소셜 워커(사회복지사)들의 개입 과정을 거치고서야 NDIS 승인을 받게 된 것이라는 점이다. 엄마의 진단명은 ’Early Onset Dementia (65세 이전 치매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에 해당)’으로 엄마의 이상 증세를 느낀 2014년부터 진단과 승인까지는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참으로 오랜 고통의 시간이었다. 

엄마는 마음이 여리고 따뜻한 분이었다.  지금은 치매 때문에 예전 모습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아이들을 보면 좋아하는 예쁜 원래의 모습을 갖고 계신다. 엄마는 사람의 아픈 마음을 잘 품으셨던,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항상 기댈 수 있던 분이었다. 남을 먼저 생각하며 교회와 가정에 온 힘 다해 섬기셨던 분으로 엄마가 담근 가지각색 김치, 생일 때의 찰밥과 홍합 미역국, 비 올 때 부쳐 주시던 빈대 떡, 설날 함께 빚은 만두…엄마가 해준 음식은 다 맛있었고 한 번만이라도 다시 먹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엄마랑 겨울에 이불 덮고 같이 TV 보며 웃고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 그렇게 함께 했던 소소한 시간들이 너무나 그립다. 

엄마의 세 딸 모두 결혼하고 직장을 다니다 보니 엄마를 직접 케어 하기는 쉽지 않아서 그 부분에 죄책감이 많이 컸고 사실 그 죄책감은 여전히 남아있다. 무엇보다 치매로 인해 변한 낯선 모습을 보면서 내가 아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예측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행동들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평생을 함께 해오신 아버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큰 아픔이었다. 직장 생활하면서 매일 매일 일상에서 변한 아내의 모습을 보고 일일이 케어할 때마다 몸도 힘들지만 심리적으로도 고통스러워하셨다. 죄책감과 힘듬 속에서 사랑으로 케어하셨지만 아버지마저 차츰 약해지고 무너지는 모습을 자식들로서 지켜볼 수만은 없었기에, 또 마음은 너무 아프지만 조심스럽게 힘든 결정을 해야 했다. 즉 엄마와 가족 모두에게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엄마를 그룹 홈에 모시는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코디네이터 선생님들은 서로의 기대가 다를 때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할 수 있도록 조정 역할을 잘 해주셨다.
코디네이터 선생님들은 서로의 기대가 다를 때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할 수 있도록 조정 역할을 잘 해주셨다.

이런 가운데서도 당연히 가족의 모든 생활은 엄마 위주로 바뀌게 되었다. 일상 생활에서의 샤워 등 개인 위생 관련, 숟가락 들고 식사하시는 것까지 하나하나 다 도움이 필요했다. 가족이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하고, 말이 없어지고, 숫자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TV에 나오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이런 일들이 발견될 때마다 절망스러웠다. 여기서 더 나빠질 수 있을까 라는 상황에 직면할 때는 믿고 싶지 않았고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그냥 모든 것이 캄캄하고 무서웠다. 

그나마 NDIS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지인을 통해 카스를 소개받고 신청 시 여러가지 전문적이고 실제적인 도움을 받은 것은 큰 다행이었다. 작업 치료사(OT: Occupational Therapist), 심리 상담가, 영양사 등 다양한 건강/의료 전문가의 평가 및 리포트를 받아서 NDIS와 여러 차례 미팅을 가졌고 승인 후에는 카스 서비스를 받게 되었다.

엄마는 현재 그룹 홈에 거주하신다. 집이 엄마에게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곳이라 원래는 서포트 워커들의 도움과 함께 집에서 케어 받는 것으로 신청했지만 가족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사이 엄마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 갔다. 병원에도 몇 달 입원했고 그런 상황에서 카스 코디네이터 선생님과 함께 상의하면서 방법을 찾던 중 우여곡절 끝에 현재 계시는 SIL (Supported Independent Living) 그룹 홈으로 옮기게 되셨다. 

새로운 환경이라 처음에는 쉽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현재는 잘 적응하고 계시니 그나마 안심이 된다. 치매를 앓고 병원에 오래 계시면서 늘었던 체중도 그룹 홈에서의 규칙적인 식사로 정상으로 돌아오고 무엇보다 안전하게 잘 지내고 계시니 감사하다. 아빠와 가족들이 정기적으로 엄마를 방문하고 있고 우리 집 또한 엄마가 계신 곳과 가까워 주말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를 방문하는데 그 때마다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른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이전에 경험한 일도 아니어서 특히 정신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우리 가족이 매우 힘들었던 시간, 민감한 사안들도 많은데 그 때마다 전문적으로 가이드하고 서포트 해 주신 카스에 감사드린다. 직접 엄마를 돌보는 서포트 워커분들, 서로의 기대가 다를 때마다 커뮤니케이션이 잘 될 수 있도록 중간에서 조정해 주며 함께 해준 코디네이터 선생님들..

남은 바램은 엄마가 계속 이렇게 카스 서비스를 받으면서 최선의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가운데 엄마의 모습 이대로 오래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기사 제공= 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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