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새벽, 동네 산책길에 난데없이 안개가 잔뜩 끼여있다. 시야가 좁아진 채로 걷는다. 하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걷고 있다. 십수 년째 여명을 시작으로 밝아오는 해를 맞이하며 나무 한 그루까지 눈인사를 해 온 터이니까. 어찌 되었든 지금은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다. 제주도 ‘한 달 살이’도 그렇게 안개 속에서 시작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몇 년 만에 방문한 서울 나들이에서였다. 시드니로 돌아 올 날이 다 되어갈 즈음 제주도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 장기 해외 출장으로 집을 오래 비워야하니 한 달 살이를 해 보지않겠냐고. 아무 계획도 세울 사이 없이 훅 들어온 제안에 머리 속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은퇴를 한 상태라 일단 시간은 자유로우니 유혹을 물리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차분히 준비를 시작해 본다. 시드니행 비행기 날짜 연기에 성공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벌써 안개가 다 걷힌 느낌이다. 

이십여 년도 훨씬 전에 제주를 다녀 간 적은 있었지만 단체관광이라 수박 겉핥기 식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그 곳을 느껴보고 싶은 욕심도 생긴 터였다. 제주도의 많은 오름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어 있는‘거문 오름’을 우선 택했다. 미리 예약한 사람들만 시간별로 모여 해설사와의 트레킹이 허용된다. 음식물 반입, 스틱 사용 금지 등으로 인해 잘 보존 된, 그래서 거의 훼손되지 않은 자연 속을 걸을 수 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같이 출발하여 단체로만 움직이니 주위를 맘껏 둘러볼 개인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안타까웠다. 보이는 것 조차 제대로 살펴 보지 못 하는 그 답답함은 안개 속 보다 더했다. 

그래서 다음 일정은 원하는 시간을 맘껏 보낼 수 있는 국립제주박물관으로 정했다. 중앙홀 천정이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한다. 한라산 백록담 전설과 개국신화 등을 재해석한 스테인드글라스가 포근히 나를 감싸안는다. 180만 년 전부터 10만 년 전까지 일어난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졌다는 아득한 역사를 자세히 보면서 흥분이 일기 시작했다. 

1 만여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바다의 수면이 높아지면서 육지와 분리되어 ‘섬’이 되었다는 제주의 탄생은 마치 내가 아이를 낳아 세상에 내놓던 때의 신비로움을 되살아나게했다. 용암으로 만들어진 화산섬이라 사람들이 살기에는 척박하고 힘겨운 생존의 공간이라는 설명을 읽으면서는 나의 이민 정착 초기가 떠올랐다.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는 열린 섬으로 여러 문화가 들어오기도 하였지만 고립된 섬으로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기도 했다하니 내 삶과도 닮은 듯하여 그 분위기에 점점 빠져들었다. 호주에서 여러 문화를 접하기도 하지만 집 안에서는 한국 전통을 유지하려 애쓰며 아이들을 키웠으니까. 전시된 어느 문장도 놓치지 않고 읽고, 감상하고, 느끼고, 게다가 상상까지 하다보니 개관 시작 시간에 들어 온 나는 벌써 늦은 오후가 다 되었음을 알았다. 

해설봉사자가 슬며시 다가오더니 ‘혹시 직업이.. 역사 연구이신가요?’ 하며 매우 조심스레 조용히 묻는다. 관람 소요시간이 60분으로 되어있다. 학생 단체 관람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뜻이리라. 이토록 장시간 건물 내에 머무는 것이 흔치 않으니 아마 CCTV에 이상하게 잡혔나보다. 그런데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전시해 놓은 박물관 입장료가 무료이다. 그제서야 아쉬움없이 건물을 나서려는데 배고픔이 몰려온다. 건물 입구 카페에서 먹거리를 사들고 밖으로 나왔다. 야외도 여느 공원 못지않다. 나무로 둘러싸인 흔들 그네에 앉아 다리도 쉴 겸 맑은 공기와 함께 떠가는 구름 감상은 덤이다. 내가 겪어보지도 않은 역사를 겨우 눈에 보이는 자료와 영상, 기증품들을 통해 이해하려 하다보니 그나마 희미한 안개 속에서 빠져나온 느낌이다. 

 40여년이나 알고 지내는 지인의 집에 머물며 몰랐던 그녀를 좀 더 알게 되었다. 특히 김치 냉장고에 그득했던 곰삭은 김치와 여러 종류의 장아찌들을 맘놓고 꺼내먹으며 그녀의 또 다른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소한 제주시에서 한 달 가까이 기거하며 먹고 자고 놀아보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어도 내겐 대단한 행운이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공을 세웠기에, 아니면 그 동안 살아내느라 애썼다고 하늘에서 상을 주시나? 그것 역시 안개 속이다. 마지막 날, 근처 제주신산근린공원을 산책하며 상상해 보았다. 만약 이 순간 안개가 자욱했다면 낯선 이곳에서 얼마만큼을 볼 수 있었을까. 마침 아주 맑은 날이었기에 6.25기념탑이며 매일 저녁 문화생활을 즐겼던 문예회관 건물까지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이어지는 시드니 동네 산책길에선 안개가 조금씩 걷혀가더니 저 멀리 새로 지어올린 고층 아파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못 보고 있을 뿐이다. 이미 지니고 있었을 그녀의 너그러움을 이제야 보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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