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애가 된다더니 요즘 들어 남편 영감이 반찬 투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애같이 투정 부리지 말고 당신이 직접 식품점에 가서 먹고 싶은 것들 맘대로 골라 봐요.” 나의 짜증 섞인 말투에 언짢은 표정을 짓더니 남편은 어느새 식품점 안으로 사라졌다. 

식품점 한쪽에서 이것저것 둘러보던 남편이 갑자기 “도토리묵이다!” 하며 마치 귀인을 만난 듯 환호했다. 난 속으로 ‘자기 엄마라도 만난 듯 반가워하네.’ 하며 시큰둥했다. 도토리묵을 사느니 마느니하며 티격태격하다 결국은 묵 한 통을 사 들고 우린 식품점을 나왔다. 

남편은 장남이므로 난 결혼 후 계속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흔히 말하는 시집살이를 했다. 그래도 시어머니가 내 다섯 애들을 모두 돌봐 주었으니 따져보면 내가 더 많은 덕을 본 셈이다. 우리가 이민 올 때 시어머니도 우리와 같이 와서 우리 가족의 이민 역사는 시어머니와 함께 시작되었다.

시어머니는 시드니에 오자마자 교회를 찾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교민을 위한 모든 정보는 교회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어느날 시어머니는 교회 정보 중 최고의 정보를 얻어 냈다. 시내에서 동쪽으로 얼마 안 가 큰 공원이 나오는데 그곳에 가면 도토리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는.. 시어머니에게는 말 그대로 고급 정보였다. 센테니얼파크라는 이 공원에는 도토리나무가 많아 도토리 철만 되면 나무에서 도토리가 우수수 떨어져 나무 주변이 온통 도토리밭이 된다는 것이었다.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어머니는 어느 토요일에 아들, 며느리, 손주들을 다 동원해 공원으로 데려가더니 도토리 줍기 작전에 들어갔다. 시어머니는 25킬로짜리 빈 쌀 포대 몇 개를 미리 완벽하게 준비해 놓고는 우리 모두에게 지체하지 말고 빨리빨리 주워 담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도토리엔 관심도 없는 아이들은 공원 이곳저곳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나는 시어머니의 눈치를 봐 가며 슬슬 주워 담았고 남편은 허리 아프다며 엄살을 떠는 듯했다. 빨리 집에 가자고 보채는 아들의 말도 무시한 채 오직 시어머님만이 장렬한 용사가 되어 포대마다 도토리를 넘치도록 채워나갔다.

도토리묵 공정은 대략 이러했다. 포대에서 나온 도토리들을 바닥에 널찍하게 펼쳐 놓고 햇볕에 잘 말린 후 도토리 껍질을 깠다. 껍질 밖으로 나온 도토리 알들을 큰 양푼에 담아 물을 가득 채운 후 며칠 동안 불렸다. 불려진 도토리를 믹서에 갈았다. 갈아진 도토리에 다시 물을 부어 놓은 후 가라앉혔다. 곱게 가라앉은 가루를 다시 자루에 넣어 힘주어 문지르면 도토리 진액이 나오며 이 진액 전분으로 묵을 쑤는 것이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어느새 나도 서당 개가 되어 이 정도는 알게 되었다. 

 우린 도토리를 집 앞 차도에서 말렸다. 제 자리를 빼앗긴 자동차는 이내 길가 도로로 밀려 나갔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쾌청한 날이면 도토리들은 차도의 넓은 시멘트 바닥 위에 널브러져 상쾌한 일광욕을 만끽했다.

아무리 오래 불려 논 도토리라도 도토리 자체가 워낙 단단한지라 믹서가 힘을 쓰지 못할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러다 보면 때때로 믹서의 모터가 터져 버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울 시어머니 도토리묵 생산 과정에서 적어도 네댓 개의 믹서 모터가 터져 나갔고 이때마다 시어머니는 믹서 제조업체를 원망했다. 

“어째 이땀시로 기계를 허약하게 만들어 놨담!” 그러나 새 믹서를 또 사야하는 나는 속에서 불이 났다. 

“도토리묵 팔아 믹서값도 안 나오겠네.” 라며 난 속으로 투덜거렸고 잔뜩 약이 올라 있었다. 두고두고 집안의 영광이자 웃음거리가 된, 터져 나간 믹서 사건이었다.

시어머니의 도토리묵 작업실이 되어 버린 우리 집 세탁실의 벽면 아래쪽은 늘 누런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얼룩들은 도토리 가루 만드는 과정에서 튀어 나온 도토리 물감 같은 것들이었다. 이 얼룩들은 아무리 닦고 또 닦아도 없어지지 않아 늘 깔끔 떠는 내겐 큰 골칫거리였다. 그 거무스름한 진액으로 묵을 쑬 때면 난 늘 시어머니의 조수가 되어 부엌 가스 불 앞에 서서 긴 나무주걱으로 끓고 있는 묵을 팔목이 달아날 정도로 오래오래 저어야만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난 시어머니가 만든 도토리묵을 좋게 볼 리 없었다. 맛있게 먹어 본 기억 또한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해 쳐다보기도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어머니가 이렇듯 엄청나게 힘든 작업을 어떻게 혼자 다 해냈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 조그만 도토리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 내는 일이란 상상만으로도 아찔한데 울 시어머니는 그 많은 도토리를 혼자 다 깠으니 참으로 대단한 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난 도토리를 한 번도 까 본 적이 없었다. 도토리 까기가 마치 당신만의 일인 양 시어머니는 우리 식구 중 그 누구에게도 일을 시킨 적이 없었다.

식품점에서 산 도토리묵에 양념을 뿌리던 중 문득 시어머니한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시어머니의 도토리묵 만드는 공정 중 내가 한 것이라곤 오직 젓는 일뿐이었는데 그걸 가지고 불평했던 옛날의 내가 부끄러웠다.

“오랜만에 도토리묵 먹어 보네. 이야! 참 맛 좋다. 맛있긴 한데 옛날 어머니 묵 맛보단 못하네.” 

양념한 묵을 맛있게 먹던 남편의 말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남편에게서 난 그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다. 아무리 유명한 요리사가 만든 음식이라도 엄마의 손맛이 빠진 곳에는 늘 맛의 아쉬움이 따를 것이다. 

시어머니와 함께 도토리로부터 시작된 우리 가족 이민 역사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토리묵은 한국 식품점에 납품되었고 시어머니는 그 수익금을 교회 건축 헌금으로 썼다. 어머니 고생한다며 남편은 한사코 말렸건만 시어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묵 생산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원자재인 도토리가 동이 날 때쯤 되면 우린 다시 그 공원을 찾기도 했다.

 어느 날 중학생이었던 셋째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할머니를 찾았다. 딸은 학교 가방을 열어 도토리를 한 줌 꺼내 놓더니 자기 학교에서 주워 온 것이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학교에도 도토리나무가 있어 할머니를 기쁘게 해주려고 주워 왔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려 그려 잘했다, 잘했어. 아이고, 이렇게 할미 생각해서 학교에서부터 끌고 왔구먼.” 하며 손녀를 기특히 생각했다. 한 줌밖에 안 되는 도토리로 할머니를 크게 감동시키고 할머니의 마음까지 산 작은 일화였다.

시어머니의 도토리묵 제조 공장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작정한 건축 헌금액이 채워지자 시어머니는 공장문을 닫았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만든 우리 시어머니표 도토리묵이 지금 왠지 그리워진다. 그때는 그렇게 보기도 싫고 먹기도 싫던 묵이 이제 와서 새삼 그리워진다는 것은 이제야 내가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일 테다. 시어머니를 그토록 강철 같은 여인으로 만든 그 힘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시어머니의 묵에 얽힌, 말로 다 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 정성, 수고를 난 이제야 깨달은 것 같다.  

 

작가 소재: 심무경  

이민 법무사 외에 무역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은퇴 후에는 한때 손주 돌보미로 바쁘게 살았으나 지금은 글쓰기에 행복하고 바람직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호주에서 거의 반백 년을 살다 보니 진정한 고향은 어디일까 하는 의혹도 짬짬이 들었으나 글을 쓴 이후 정체성이 분명해졌다. 한글과 함께하는 한 진정한 고향은 역시 한국이다.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수필 7편 연재

최근 출간된 시드니 동포 여성 7명의 수필집인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한호일보 3월3일자 12면 게재)에서 작가와 출판사의 허락을 받고 수필 7편을 매주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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