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졸업식 날 ‘이제 해방이다’라는 생각에 기뻤고 공부는 끝이라고 후련해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렀다. 애들 키워서 결혼시키고 일에서 은퇴하고 나니 이제 슬슬 다시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이민자를 위한 영어 회화반을 다니다가 영어도 배우고 성경 공부도 할 겸 일주일에 하루는 호주 교회의 바이블 스터디 교실에 다닌 지도 십 년이 넘었다. 다시 학생이 된 것처럼 매주 목요일 공부반에 다니고 집에서는 교재를 펴서 숙제하는 일이 내 삶의 우선 과제가 되었다.

함께 공부하는 열댓 명 되는 이들은 학창 시절 친구처럼 허물이없다. 코비드 때문에 밖에 외출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지난달 마가렛이 번개팅을 제안하여 다 함께 근처 볼링클럽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7월이 생일인 나와 네리를 축하할 겸 만든 자리였는데 모두 여덟 명이나 모였다. 그런 자리는 처음이라서 나는 생각이 많았다. ‘우리 두 사람을 위해 나머지가 점심을 사 주려나? 그럼 우리는 차와 케이크를 사 주어야 하나?’ 하고 눈치를 보는데 당연한 일처럼 각자가 자기 몫을 계산하는 걸 보고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그날 찍은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날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셀리나는 일제가 스리랑카에서 총을 쏘아 대며 침략 전쟁을 벌이던 당시 20대였고, 그때 가족과 함께 쪽배를 타고 호주로 도망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녀는 몸으로 체험한 신앙과 은혜로 우리 모임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올해 90세가 된 그녀는 눈과 귀가 어두워 제 역할을 하지 못했어도 공부를 그만두지 않았다. 수업 전날마다 가까운 친구가 찾아가서 교재를 읽어 주고 함께 공부해 왔다. 목요일이 되면 우리 반 친구 중 하나가 그녀를 데려오고 또 데려다주었다. 상대방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고 꼭 안아 주면서 세월의 무게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 갔다.

10년 이상 우리 공부를 인도해 온 이는 마가렛이다. 그녀는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이면서 신학 공부를 파트타임으로 했다고 한다. 구약을 공부할 때 그녀는 이스라엘을 비롯한 성지를 몇 차례 순례하며 찍어 온 사진들을 보여 주는데, 시청각 효과가 있어 지루함을 덜어 준다. 어느 해인가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 만찬을 그대로 재현했다. 우리는 준비해 간 양다리, 이스트가 안 들어간 납작빵, 셀러리, 삶은 달걀을 준비해 가서 서양 고추냉이 소스에 찍어 먹으며 성찬을 즐기기도 했다. 우리 중 유일하게 독신으로 살아온 메건은 공부도 많이 해서 젊었을 때는 좋은 직업에 종사했지만 우울증을 앓은 지 오래되었다. 그녀는 코비드 규제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지내야 했던 지난 일 년이 무척 힘들었다고 이야기했다. 밤에는 혼자 사는 아파트에 누군가가 침입한다는 공포에 시달려 끊었던 우울증 약을 다시복용했다. 약 후유증으로 몸무게도 15킬로나 늘었단다. 우리는 자주 그녀에게 안부 전화도 하며 자매처럼 돌보아 준다. 늘 온화한 표정의 이본느는 오늘도 바쁘다. 거의 30년 가까이 살아온 집을 팔고 고향 근처로 이사를 계획하고 있다. 중년의 나이에 이혼하고 재혼한 그녀는 자기 자녀 셋에 남편의 자녀들까지 있는 대가족의 주인이다. 바람 잘 날이 없는 그녀지만 힘든 문제보다 즐거운 가족의 대소사가 더 많아 보여서 우리의 부러움을 산다. 70세 밖에 안 된 그녀는 어느 날 손녀의 결혼식 사진을 보여 주더니 얼마후 그 손녀가 낳은 증손녀의 사진까지 보여 주어 우리의 환성을 자아내게 했다. 그 대가족의 화목을 지탱하는 힘은 자상하고 상냥한 그녀의 성품일 것이다.

노인용 보행기를 끌고 다니는 헬렌은 유전적 결함으로 다리에 이상이 있어서 한 발씩 간신히 떼어 걸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운동 부족으로 과체중이 되어 고생한다. 불편한 다리를 보상이나 하듯이 헬렌은 언변이 뛰어나다. 문제의 해답을 말하다가 해박한 성경 지식 때문인지 늘 엉뚱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튄다. 토론의 문화속에서 자란 호주인들은 너나없이 뛰어들어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안타깝게도 내 영어 실력으로는 그들 가운데 끼어들 여지가 없기에 그저 조용히 듣기만 한다. 몇 년 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80대의 지니는 모임에서 늘 외로움을 호소한다. 남아프리카 출신인 지니는 얘기 중에 우연히 린이 같은 남아프리카 출신임을 알게 되어 반가워했다. 그 후로 둘은 나이 차가 많은데도 서로의 집을 오갈 정도로 친해졌고 지니의 입에서 외롭다는 말이 줄어들었다. 어느 나라 사람이나 고향 사람은 역시 반갑고 금방 친해지나 보다. 그녀의 세 자녀 중 60대인 아들 하나는 일주일에 한 번 날을 정해서 근처 카페에서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서 찾아온다고 한다. 다정한 아들이었다. 그녀처럼 외로움을 혼자 견디기보다 때로는 자녀들에게 마음을 호소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몇 년 전에 재혼해서 행복을 다시 찾은 리는 혼자 독립해 사는 20대의 의붓딸이 있다. 그 애는 대학을 쉬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있었다. 때때로 술에 취해 밤중에 전화를 걸어 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리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고 한숨을 쉬었다. 리의 딸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끝나자, 뒤이어 네리가 막 20대가 된 손녀딸이 전자담배를 피워 대고 술을 자주 마신다고 기도 요청을 해 왔다. 그 옆에있던 실라는 손자가 며칠 전에 대학 입시 과목을 치르는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숨을 쉬었다. 나도 14살이 된 손자가 가끔 학교를 빼먹고 사라져서 학교에서 아들에게 전화가 왔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늘 이렇게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하자고 약속했다. 나이 70이 된 우리의 걱정거리는 아들과 딸을 지나쳐 이제는 손자손녀 문제로 이어졌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요즘 세상이 문제라고 한숨짓는다. 손주들이 몇 시간씩 개인 전화기나 컴퓨터로 게임이나 유튜브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른다는 게 늘 공통된 화제였다. 그런 것들이 없었던 옛날이 좋았다고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탄식했다. 자랄때부터 바르게 살라는 유교적 교육방침으로 가정교육을 철저하게 받고 자란 한국 아이들과 다르게 호주 아이들은 자유롭게 자랐다. 무방비 상태로 적을 맞은 것처럼 달콤해 보이는 유혹에 맥없이 무너지고 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여기서 태어난 내 손자 또한 호주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자녀와 손주들 문제를 함께 걱정하고 기도해 준다. 마음의 짐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나이가 들어서 병에 자주 걸리고 몸이 불편해져도 숙제를 안 해오는 친구는 거의 없다. 모두 자기 차례가 오면 어김없이 집에서 적어온 답안을 읽어 간다. 자기가 쓴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고 헤맬 땐 한바탕 웃음꽃이 핀다. 숙제하기 위해 긴장하고 머리 싸매어 준비하는 시간이 내 건강을 유지해 준다는 걸 이젠 알 수 있다. 매주 다니는 성경 공부반은 나의 자랑이요, 보람이 되었다. 태어난 나라와 사는 방식이 달라도 같은 교실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함께 공부하는 동안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한국음식이나 문화에 관심을 보이며 자주 물어 온다. 헬렌은 몇 년 전에 한국에 다녀와서는 내게 곧잘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나는 그들을 통해서 호주 사람들의 타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를 몸에 익히게 되었다. 또한 모든 걸 아껴 쓰며 자연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을 존경한다. 70이 넘은 나에게 나의 공부반과 그 친구들은 젊음을 지탱해 주는 끊을 수 없는 마약이 되었다.

 

작가 소개:  양혜자 

서울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결혼 후 남편의 근무지인 도쿄와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거주하기도 했다. 30년전 호주로 이민와 세탁소와 한국책 대여점을 운영했다. 은퇴하여 소장한 장서에 파묻혀 남편은 붓글씨를, 저자는 독서와 글쓰기로 여유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수필 7편 연재

최근 출간된 시드니 동포 여성 7명의 수필집인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한호일보 3월3일자 12면 게재)에서 작가와 출판사의 허락을 받고 수필 7편을 매주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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