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빗줄기가 심하게 몰아쳤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에는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베란다에 나가니 피어오르는 운무(雲霧) 위로 얼굴을 내민 산봉우리들이 반긴다. 비가 내린 덕분에 시야도 맑다. 오래전에 가 보았던 엘렌보로 폭포(Ellenborough Falls)가 생각난다. 호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에서 물이 떨어진다는 폭포다. 지금 바라보는 산봉우리 어딘가에 숨어 물을 떨어뜨리고 있을 것이다. 비가 왔으니 볼만할 것이다. 다시 한번 찾아가기로 했다.

산속 깊은 계곡에 번지수가 적혀있는 우체함
산속 깊은 계곡에 번지수가 적혀있는 우체함

폭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한 시간 조금 더 운전하면 갈 수 있다. 그러나 비포장도로를 운전해야 한다. 많은 비가 내렸으니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하늘에는 아직도 비구름이 오락가락한다. 하루 더 지내고 떠나기로 마음을 바꾼다. 은퇴한 삶 아닌가. 조급히 서두를 이유가 없다. 가고 싶은 날 떠나면 된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파란 하늘이 보인다. 특별한 준비 없이 폭포로 향한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호주 특유의 시골 풍경이 차창 밖에 펼쳐진다. 초원과 숲이 어우러져 있는 작은 산등성이가 계속된다. 끝없이 넓은 목초에서 한가히 노니는 수많은 소가 수채화 그림을 연상하게 만든다. 집 몇 채가 오손도손 모여있는 작은 동네를 지나친다. 잘 정돈된 자그마한 공동묘지도 정겹게 눈에 들어온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호주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호주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 

도로변에 있는 언덕에 잠깐 주차했다. 주위 풍경이 시선을 끌기 때문이다. 매닝강(Manning River)이 굽이치며 흘러간다. 푸른 초원으로 뒤덮인 넓은 들판 구석에 서너 마리의 가축이 한가로이 서성거리고 있다. 이러한 경치가 한눈에 내려 보이는 높은 언덕에 고급스럽게 보이는 저택이 있다. 저택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을 것이다. ‘경치가 밥 먹여 주냐’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시야가 확 트인 곳에서 지내면 마음도 넓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시인의 주장이 떠오른다.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시야가 짧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도 좁을 수밖에 없다는 푸념이다.

폭포에 가까워지면서 도로는 숲속으로 들어선다. 도로 이름이 바뀌지 않는 외길이다. 따라서 가끔 보이는 집이지만, 번지수가 천 단위를 넘어선다. 집 앞에 세워져 있는 우편함에 2934라는 숫자가 보인다. 이렇게 외진 곳을 삶의 터전으로 택한 사람과 술 한 잔 나누고 싶다. 외로운 삶을 어떻게 이겨내며 지낼까. 아니 외로움을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외로움을 친구 삼아 지내는 사람일 것이다. 한국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깊은 산속에 터전을 잡은 사람이 떠오른다.  

산림 개발에 반대하며 농성하는 사람들
산림 개발에 반대하며 농성하는 사람들

폭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착하니 현수막과 함께 크고 작은 텐트들이 보인다. 자연을 보호하는 사람들의 시위 현장이다. 코알라를 비롯해 야생 동물이 사는 숲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알라 사진을 걸어 놓은 텐트도 보인다. 인간의 편안함을 우선시하는 개발이 아니라, 불편해도 자연을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지구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오래전 보았던 공익 광고가 생각난다.

폭포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지만 대여섯 대의 자동차가 주차해 있다. 젊은 남녀가 캠핑카를 열어 놓고 늦은 아침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이곳에서 식당을 개업하느냐고 묻는 나의 농담을 웃음으로 받으며 멋진 하루 보내라고 인사한다. 주차장 근처에 마련된 탁자에는 화려한 탁자 보를 펼쳐 놓고 노부부가 빵과 커피를 즐기고 있다. 노부부가 타고 온 캠핑카에는 서부 호주(Western Australia) 번호판이 붙어 있다. 이곳까지 

아침에 베란다에서 마주한 운무가 낮게 깔린 풍경
아침에 베란다에서 마주한 운무가 낮게 깔린 풍경

오려면 수천 킬로미터를 운전했을 것이다. 호주 전역을 여행하며 삶의 끝자락을 함께하는 부부의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주차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전망대를 찾았다. 골짜기 아래로 물 폭탄을 퍼붓는 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안내판에는 폭포 높이가 200m라고 적혀있다. 폭포도 장관이지만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계곡 또한 시선을 사로잡는다. 낭떠러지를 타고 떨어진 물은 계곡 사이를 흘러가고 있다. 긴 여정을 거쳐 바다에 도착할 것이다.

산책로를 따라 폭포 아래로 내려간다. 가파른 길이지만 잘 정돈되어 있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산책로에는 물에 젖은 낙엽도 있다. 미끄러지기 쉽다.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 이름 모를 버섯들이 보인다. 물기를 듬뿍 머금은 싱싱한 나뭇잎이 보기에 좋다. 공기도 신선하다. 울창한 숲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내는 샤워를 하는 느낌이다. 

폭포가 떨어지는 아래까지 내려왔다. 아래에서 올려 보는 폭포는 더 웅장하다. 물 떨어지는 소리도 장관이다. 그런데 옆에 있는 청년이 운동화를 벗어들고 무엇인가 찾고 있다. 거머리가 있다고 한다. 나도 자세히 보니 작은 거머리 한 마리가 청바지에 붙어 머리를 쳐들고 있다. 징그러운 거머리다. 그러나 거머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들 나름의 생존방식 아닌가. 폭포 주위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거머리 때문에 취소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올라간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폭포
전망대에서 바라본 폭포

가파른 산책로를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다. 중간에 숨을 돌리기도 하면서 주차장에 도착했다. 잠깐 숨을 고르고 또 다른 산책로를 찾았다. 산등성이를 따라 조성한 아이들도 쉽게 걸을 수 있는 평탄한 길이다. 숲에서 내뿜는 촉촉한 향기를 가슴 깊이 마시며 걷는다. 걷기 명상이라고 하던가,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흙내음도 몸으로 느끼려고 정신을 집중하며 천천히 걷는다.

산책로 끝나는 곳에 설치한 전망대에 올라 폭포를 마주한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폭포가 인상적이다. 다른 폭포를 보는 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모두 보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전망대를 떠나 돌아가는데 커다란 개미집이 눈에 들어온다. 퀸즐랜드 내륙에서 수없이 보았던 개미집과 다름없다. 더운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개미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장기가 올라온다. 주차장에 있는 카페를 찾았으나 영업하지 않는다. 영업시간도 적혀있지 않았다. 주인 마음대로 장사하고 싶을 때 문을 여는 것 같다. 흔히 이야기하는 엿장사 마음대로다. 

산책로에서 마주친 개미집
산책로에서 마주친 개미집

카페를 찾아 폭포 입구에 있는 동네(Elands)에 가 보았다. 작은 동네다. 그래도 초등학교는 있다. 우체국도 보인다. 그러나 카페는 없다. 가지고 온 음료수와 초콜릿으로 대충 때울 수밖에 없다.

작은 동네를 둘러본다. 복덕방에서 세워놓은 큰 간판이 보인다. 수많은 산이 파도처럼 널려있는 경치가 내려 보이는 집이다. 이러한 집에 살면 신선이 된 기분일 것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할까. 몸이 아프면 어떻게 대처할까. 외롭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현실적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서로 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작은 동네이기에 어려움이 다가와도 함께 헤쳐 나갈 것이다. 

걱정은 생각 속에만 존재한다고 한다. 생각이라는 것은 현재보다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다. 내일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지금을 만끽한다. 멋진 풍광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지금, 이 순간을.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으며 주어진 시간에 전념하겠다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초원에 있는 젖소들의 한가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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