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깨끗한 수영장은 자연이 그려주는 대로 무엇이든 담아내는 좋은 화폭이 된다. 파란 하늘의 흰구름을, 먹구름을, 나무의 그림자를,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모습들을 그려주고 있다. 얼마 전에는 화사한 보라색 자카란다 꽃잎이 수영장 가득 떨어져서 한 폭의 모네의 그림을 보는듯 황홀경에 빠졌다. 지금은 분홍색 줄 장미의 꽃잎이 미풍에 날려 와서 하늘거리며 물 위에 가득 떠 있다. 가벼운 꽃잎은 물결이 이는 대로 이리저리 떠다니며 아름다움을 연출해 주고 있다. 어느덧 수영장은 장미의 향기로 가득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부부 모두가 수영을 못하고 수영장을 바라만 보고 있다. 남편은 아예 물에서 뜨지도 못하는 수준이고 나는 겨우 물에서 뜨기는 하는데 숨을 쉬려면 이내 가라앉는다. 수영을 배울 때 코로 입으로 물이 들어가는 어려운 고비를 못 넘긴 탓이다. 물에서 걷기만 해도 운동이 된다고 하지만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기가 쉽지 않고 또 자주 다리에 쥐가 나서 힘들기도 하다. 이래저래 우리는 수영장 관리만 하고 손주들이 수영하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알고 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놀고 간다. 그럴 때면 시끌벅적, 첨벙첨벙 고함 소리와 함께 모처럼 집은 활기를 되찾는다.

어느 날 무료하게 수영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어미 오리가 새끼를 여러 마리 거느리고 나들이를 나왔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물에서 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발견한 것이다. 수영 강습을 하러 왔는지 더운 여름에 피서를 왔는지 모두가 물에 둥둥 떠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이곳을 어찌 알고 찾아왔을까 어디서 왔을까 어린 새끼들을 거느리고. 참으로 신기했다. 

한동안 신나게 놀다가 어느새 어미 오리가 이만하면 충분히 놀았다 생각했는지 수영장 밖으로 나갔다. 새끼들은 더 놀고 싶으나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엄마를 놓칠세라 물 밖으로 나가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어린 오리들의 짧은 다리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뭍으로 올라 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미가 수영장 난간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우왕좌왕 헤매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들어올 때는 호기 있게 들어왔는데 이런 난관이 있을 줄이야! 어미도 미처 생각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나 보다. 저들이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기다려 주었는데 헤어 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새끼 오리들이 놀랄까 염려되어 조심스럽게 다가가 뜰채로 한 마리씩 꺼내 주었으나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오늘 우리가 베푼 작은 돌봄이 오리들에게는 구원의 생명선이 되었을 것 같다. 착한 일을 한 것 같아 온종일 흐뭇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지간히 혼이 났는지 그 후로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 얼마나 자랐는지 한 번 더 놀러 오면 좋으련만. 

지금은 맑고 깨끗한 수영장이 나의 마음을 비쳐주는 거울이 되기도 하고 더위도 식혀주는 역할도 해주지만, 한 때는 매몰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수영장 근처의 큰 나무와 수양버들 가지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많은 낙엽을 떨어뜨렸다. 특히 가지나 나무 껍질같이 무거운 것은 쉽게 바닥에 가라앉았고, 청소하는 기계도 그것을 쉽게 제거하지 못했다. 매일 소독약을 뿌려도 여전히 이끼가 끼어, 물이 녹색으로 변해서 보기에도 지저분했다. 그래서 성가신 수영장을 메워버리려고 알아봤더니 그 일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나무부터 자른 후 수영장 전문가와 상의했다. 그의 조언에 따라 기계를 자동으로 대체하고 소독약 대신 소금으로 소독하도록 바꾸었더니 관리가 훨씬 쉬워졌다. 잘 모르면 전문가와 상의했어야 했는데 그 동안 참 미련하게 살았나 싶다. 

이제는 수영만 할 줄 알면 된다. 수영장이 늘 곁에 있고 깨끗한 물이 우리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비록 내가 수영을 할 줄 모르나,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내 몸의 힘을 다 빼고 자신의 전부를 물에 다 맡기면 뜰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운동이 다 그런가? 골프를 배울 때도 그랬다. 힘껏 내리치면 공이 멀리 가는 줄 알고 힘을 다하여 골프채를 휘둘렀는데, 공은 바로 내 코 앞에 있지 않았던가. 힘을 다 빼야 했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그러한가? 자신을 다 내려 놓고 나를 만든 창조자의 뜻에 맡기고 사는 것 그것이 내가 사는 길임을 아는데도 욕심이 앞서니 그게 마음대로 잘 안 된다. 언제쯤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또 수영은? 이 두 가지 문제가 앞으로 내가 풀어 가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홍콩에 살고 있는 아들과 손주들이 다음 달에 호주로 휴가 차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 소식을 듣던 날, 우리 부부는 흥분하여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머물고 갈 한 달 일정을 미리 짜 보고 행복해했다. 코로나로 인해, 하늘길이 막혀 몇 년째 만나지 못했으니. 지금은 오미크론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런 위험의 난관을 뚫고 이곳을 온단다. 오는 것은 반가워 두 팔 벌여 환영하는데 홍콩으로 돌아 가서 3주 동안 호텔에서 격리되어야 한다니 어찌해야 할지?

그러나 나에게는 벌써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 손주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느새 이곳에 살고 있는 사촌들과 어울려 첨벙첨벙 시끌벅적 즐겁게 뛰놀고 있다. 깔깔 웃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희망이 아지랑이가 되어 눈 앞에서 어른거린다.

작가 소개: 배명희

저자 배명희는 해방 이듬해 성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공예과 교사로 10여년 근무하다가 세 자녀를 키우며 남편의 직장과 일터를 따라 서울, 미국, 일본, 부산, 호주, 포항, 에티오피아 등 여러 나라에서 살다가 지금은 시드니에 정착하여 딸들 가까이 살며 텃밭을 가꾸는 전원 생활을 하고 있다.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수필 7편 연재

최근 출간된 시드니 동포 여성 7명의 수필집인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한호일보 3월3일자 12면 게재)에서 작가와 출판사의 허락을 받고 수필 7편을 매주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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