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머물고 있는 처소엔 여러가지 한국 물품들이 있다. 실내엔 호롱불 등잔, 엿장수 가위, 고려 때의 청동 수저, 갓, 인두, 다리미, 떡살, 대꼬바리, 탈, 박바가지, 저울, 고서적 등등이 있다. 

바깥엔 도라지, 들깨, 풍산 무우, 고랭지 배추, 부추, 매운 고추, 아삭이, 오죽, 미나리, 쑥, 아주까리, 초롱박, 토종 강냉이 등이 잘 자라고 있다.

 25 여 년 전 이 곳에 정식으로 살게 된 어느 날 어떤 노인 부부가 와서 차 한 잔을 나누면서 얘기하던 중 초창기에 이곳으로 아들 따라와서 살게 된 사연을 장시간 듣게 되었다. 그때 부인되는 분이 말하길 아들 내외가 직장에 가고 나면 온 종일 현관에 나와서 둘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면서 한국에서 있었던 지나간 얘기들을 나누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고 했다. 그러다가 비행기가 떠다니는 모습을 보게 되면 저것만 타면 한국에 가는데 하면서 지금까지 견딘다고 했다. 그땐 눈물을 글썽이면서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을 가슴 아리게 본 이후 한국에 가게 되었는데 부산에 있는 큰 골동품 가게에 가서 여러가지 옛것들을 구입하게 되었다. 베틀, 멍석, 풍구대 등등은 다 썩어서 없어진 지 오래 되었고 큰 장독대 3 개와 위에 적은 것들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저 비행기만 타면 한국에 갈 수 있는데 하면서 고개를 떨구셨던 그 노부부의 모습에서 진한 향수애와 함께 고적(孤寂)의 외로움을 바라보게 되면서 여러 종류의 고물들을 반입하게 된 것이다. 호롱불 등잔을 바라보면 그때의 모습들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한 되들이 석유 한 병이면 한 달을 써야 된다며 심지를 낮추셨던 할머니의 손길, 베틀 아래에서 자다가 잠결에 일어나다 베틀에 머리를 다친 일 등등이 산 안개처럼 스멀스멀 올라온다.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것은 생각으로도 가능하지만 그때에 사용했던 어떤 물품이 있으면 더욱 더 생생하게 현장감 있게 되살아나게 된다. 대마초를 심어서 삼베옷을 만들고 누에를 키워서 명주 바지 저고리를 숯불 다리미로 다려 입게 되는 모든 과정을 직접 보게 된 우리들 세대, 거기에서 아끼지 않을 수 없는 잔소리와 혀를 차게 되는 안타까운 한숨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수박을 먹고나서 버린 껍질에 붉은 부분이 보이게 되면 다시 주워서 먹게 하고 일일 달력 한 장을 네 등분으로 잘라서 휴지를 쓰게 했던 성철 큰 스님의 일화가 유명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은 보고 듣고 교육받은 만큼 그 인격과 가치관이 형성된다. 우리의 마음은 크고 넓기가 우주보다 더하다. 단순하고 반복되는 일이 일상화되었던 농경사회, 또한 외부에 의한 정보력이 거의 없었던 그때의 단조로웠던 일상에서 당시의 여러 경험들은 돌에 새겨진 글자처럼 오래오래 깊게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옛 얘기와 지난 물품들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끼게 되어있다. 그것이 심하면 꼰대니 라떼로 전략된다. 

제행무상은 만고의 법칙이다. 그 중에서도 보편타당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모든 존재는 고유의 가치가 있어서 귀중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족할 때였기에 아껴야 된다는 인색의 범주를 벗어나서 넉넉할 때라도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전향되어야 한다. 마켓에 가면 자기 마음대로 구입할 수 있게 진열된 갖가지의 식료품들, 식당에선 자신의 식성대로 주문할 수 있도록 준비한 무수한 손길 등등 우린 그분들의 정성과 노고에 깊은 고마움을 느낄 수 있어야 되겠다. 

이런 마음가짐을 불교에선 연기론의 철저한 이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 체계는 창조론도 우연론도 아니며 오직 연기론이라고 부처님께선 말씀하셨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게 되면 이것도 소멸된다. 이것이 연기론의 기본 법칙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과 정신체계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화 발전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자연과 우주, 농부와 과학자 등등 갖은 분야에서 애쓰고 있는 여러분들의 노력 때문에 우리들은 이렇게 평화스럽게 잘 살아가고 있다. 

무슨 모임만 있게 되면 나는 이렇게 살아왔노라고 무용담을 늘어 놓는 자기중심적 과거회귀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지금 세대는 복이 많아서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며 덕담을 상대에게 전할 때 꼰대에서 어른으로 대접받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그 어떤 현장이 주어지게 되면 말이 길어지고 그 속엔 자기 중심적인 의식 세계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느낀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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