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피터 더튼 연방 야당 대표는 5일 헌법상 원주민 자문기구인 원주민 목소리 신설에 자유당이 반대한다는 공식 당론을 발표했다. 

자유당 의원 총회 후 그와 수잔 리 자유당 부대표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자유당은 원주민 목소리 헌법 개정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원주민의 헌법상 인정과 연방이 아닌 지역(주/준주 등) 원주민 자문기구 신설에 모두 예스라고 답변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에는 단호하게 ‘노(No)'를 천명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헌법에 원주민 의견을 표명하고 입법(의회)과 정책(내각)에 대한 자문을 제공하는 헌법 자문기구 원주민 목소리를 인정할 것인가?”였다. 이에 자유당은 강력하게 ‘아니오’라고 결론 내렸다.

의회에서 국민투표 일정이 통과되면 여야는 치열한 찬반공방을 펼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돌입한다. 호주에서 마지막 국민투표는 1999년이니 23년 전 일이다. 호주 헌정사에서 국민투표는 부결되는 전례가 많았다. 특히 여야가 의견이 갈리는 경우, 통과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결과였다.

보수 강경파 위주인 더튼과 자유당 지도부가 이런 점을 간과할 리 없다. 야당으로 국민투표에 반대했다가 통과되더라도 여당의 국민부표 부결보다 상처가 덜할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도 당연히 했을 것이다. 연립 지지성향 유권자들 중 약 30%만이 원주민 목소리 신설을 찬성하는 점도 더튼이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만약 국민투표가 부결되는 경우, 반대를 주도한 자유당 수장으로서 더튼은 집권 후 승승장구하는 앤소니 알바니지 총리의 기를 꺾을 수 있고 자유당 안에서 당권 도전 가능성을 없앨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는 점도 중시했을 것이다.     

원주민 목소리 신설이 호주의 어두운 과거사(식민지 역사)에 대한 일종의 화해 형태라는 점에서 초당적 지지(bipartisan support)에 대한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기대감은 역시나로 끝나며 실망감을 주고 있다. 마치 야당으로서 여당 정책에 절대 찬성 못한다는 것처럼 ‘단호한 아니오(resounding no)’를 선언한 것이다. 

일부 자유당 의원들이 헌법개정 문안의 부분 수정(삭제)으로  절충안을 논의했지만 이것도 없던 일이 될 듯하다. 일부 야당 의원들은 원주민 목소리의 자문 역할을 내각(executive government)이 아닌 의회로 제한자고 제안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원주민 과거사 해결에 정치와 정략의 잣대를 들이댄 이상 더 이상의 협상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당은 더튼 야당대표가 헌법개정 문안 준비회의를 통해 총리를 7번이나 만났지만 어떤 제안이나 절충안을 제시하지 않다가 막판에 판을 뒤집듯 결사반대를 외치면서 전투 준비를 발표한 모앵새라고 비난하고 있다. 

물론 알바니지 총리도 헌법개정 문안을 수정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만약 수정을 허용하면서 한 발 뒤로 물러날 경우, 강력한 지지 세력인 원주민 지도자들 사이에 균열이 생겨 국민투표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튼 야당대표는 또 원주민 목소리는 ‘알바니지 총리가 주도하는 켄버라의 목소리’가 됐다고 공격했다. 이런 공격은 지난 1999년 11월 실시된 공화국 전환 국민투표(Republic Referendum) 찬반 논쟁에서 당시의 집권당인 자유-국민 연립(존 하워드 총리)이 공화제 모델을 국민들이 아닌  ‘정치인들의 공화국(the Politician's Republic) 모델’이라고 비하하며 반대운동을 전개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다. 바뀐 것은 존 하워드 총리가 피터 더튼 야당 대표로, 연립이  집권당에서 야당이 된 것이다.

결국 원주민 목소리 국민투표는 정계가 아닌 국민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호주 정치사에서 국민투표가 정쟁으로 얼룩지면 실패했다. 양당 간의 갈등은 앞으로 더욱 치명적일 수 있다. 원주민 목소리가 가결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민의가 발동돼 정치에 저항해야 한다. 연말로 예상되는 국민투표 결과로 여야 대표 중 한 명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민의를 잘 못 읽어 그 시대의 정치를 잘못 계산한 결정을 내렸다는 비난에 직면할 것이다. 알바니지와 더튼 중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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