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서 아시안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엘레인 김(36, 김혜령씨)은 2010년 호주에 정착했다. 미술공부를 시작하고, 예상대로 아시아계 여성이 백인들의 전유물인 호주 문화예술계 안으로 녹아드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큐레이터를 ‘우아한 노비’라고 표현하는 김씨가 호주에서 검은 머리 큐레이터로 자리잡기까지의 이야기를 한호일보 기자에게 털어 놓았다. 

엘레인 김(김혜령) 큐레이터
엘레인 김(김혜령) 큐레이터

‘큐레이터’의 역할부터 설명해 달라 

“큐레이터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특정 주제나 분야에 대한 작품을 수집하고 선정해서 전시회를 기획, 설계하는 직업이다. 전시회의 전체적인 디스플레이 디자인, 작품 배치, 전시 방법을 고려하고 결정해서 관람객들에게 특정 주제나 분야에 대한 이해를 돕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작품에 대한 이해력, 조직관리, 예산 관리 및 마케팅 등 전반적인 작업도 함께 진행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무래도 백인 위주인 호주 문화예술계에서 아시안 여성 큐레이터로 자리잡는 길이 험난했을 것 같다 

“엄살 같지만 정말 단 한가지도 쉬운게 없었다. 아시아계 이민자 배경의 큐레이터로 호주 미술계에서 일하는 것은 어려움이 많았다. 다행히 오기가 생기면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서 잘 버틸 수 있었다. 호주 사회는 변화해야할 것들이 여전히 많구나를 매일, 매순간 느꼈다. 비영어권자인 아시안이라서 공격을 받기도 했고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TAFE에서 미술 공부를 먼저 시작했는데  당시 그 코스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너의 까만 머리가 문제’라는 인종차별적인 발언 때문에 상처을 많이 받았다. 몇몇 백인들은 나에게 자격이 없으니 스스로 관두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못된 말과 행동을 서슴치 않기도 했다. 그 사람들의 말처럼 힘없는 아시안 여성이라서 호주에서 특별한 혜택을 받고 대학을 졸업하거나 큐레이터로서 기회를 얻은 것이 아니다.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은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도 잘한 일은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버틴 것’ 이다. 꾸준히 열심히 버티니 주변에서 인정해주기 시작했고 지금도 서로 응원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엘레인 김(김혜령) 큐레이터의 작업실
엘레인 김(김혜령) 큐레이터의 작업실

큐레이터가 되기로 결정한 계기는?

“미술대 우등학사과정(honour degree)의 마지막 과제가 프레젠테이션이었다. 다시 담당 교수님이 나의 큐레이팅과 작품 배치 능력, 미술 지식을 지적한 피드백을 읽다가 쇼크를 받아서 사흘동안 앓아누웠다. 뭐랄까.. 내 자신이 너무 바보같이 느꼈졌다. 그분들이 지적한 큐레이팅 능력과 미술적인 지식을 좀 더 배울 수 있는 큐레이터 석사 과정을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 다니던 대학에서 우수한 우등학사 성적으로 석사 코스의 여러 혜택을 주어서 큐레이터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호주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한 전시회를 소개해 달라

“첫 단독 큐레이팅 전시회는 제3의 공간(The Third Space)이라는 온라인 전시회였다. 호주로 이민 온 16명의 아시안 이민자 예술가들과 함께 일을 했는데,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철학자 호미 바바(Homi Bhabha)가 말하는 문화적 혼종성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아시안 예술가들이 호주에 정착하여 만들어낸 아시안 이민자들만의 새로운 문화와 그 과정에서 태어난 작품들에 대해 말하는 전시회였다.” 

호주 시드니 뉴타운 Kerrie Lowe 갤러리에서 열린 'A Fresh Perspective'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호주 시드니 뉴타운 Kerrie Lowe 갤러리에서 열린 'A Fresh Perspective'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도예가’로도 활동을 하고 있다는데.. 

“TAFE에서 도자기를 먼저 시작하게 되었었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성경의 말씀 때문인지 흙을 만지면서 아픈 마음이 스스로 치유됨을 느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현재는 Kil.n.it이라는 호주 예술가 18명이 모여있는 단체에 소속 되어서 개인 도자기 스튜디오를 갖게 되어서 활동하고 있다. 큐레이터 일을 시작한 이후에는 작품을 한다기보다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제 마음을 어루만지는 명상적인 도자기 작업을 혼자 많이 하고 있다.” 

전시 큐레이터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데일리 리듬(Daily Rhythms) 전시회를 할 때, 한 동양인 할머니 한 분이 관람객으로 오셨었다. 원래 그날은 일하는 날이 아닌데, 급하게 대체 인력으로 나가서 갤러리에 하루종일 있었다. 빨간색 안경을 쓴 할머니가 ‘멀리서 일부러 찾아왔다. 당신이 이 전시회의 큐레이터인가?’라고 질문을 했다. 작품의 의미성과 전시회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질문하며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분이 호주 예술가 파멜라 렁(Pamela Leung)이었다. 그 분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분께 호주 예술계에서 동양인으로써 겪는 어려움과 서러움을 투정부리듯 얘기했는데 그 분은 본인의 작품에서 쓰는 빨간색의 의미를 설명했다. 어떤 피부와 상관없이 피의 색은 똑같다는 의미였다. 그날 파멜마 렁 작가를 만나서 큰 위로를 받았다. 그 분의 열정과 당당함을 그날 고스란히 배웠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데일리리듬 포스터
데일리리듬 포스터

준비하고 있는 전시회를 소개해달라 

“세라미 엑스알(CeramiXR)이다. NSW 대학교에서 시뮬레이션 몰입형 기술(Master of Simulation and Immersive Technologies) 석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들과 교직원들에 의해 시작된 hunLAB이라는 팀과 함께 일하고 있는 프로젝트로, 큐레이터로 작년 6월부터 꾸준히 이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이 전시회는 도자기 예술에 확장 현실(XR), 인터렉티브 미디어 등의 여러 최첨단 기술을 결합하여 이루어진 몰입형 전시회이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이 전시회는 자연과 창의성, 예술과 테크놀로지, 전통과 혁신 사이의 연결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한다. 이 전시회는 올해 6월23일부터 7월8일까지 시드니 패딩턴에서 열릴 예정이니 기회가 되면 많이 찾아주기를 당부한다.”

큐레이터에 대한 철학이 있다면..  

“큐레이터로서 ‘난해한 작품’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해한 전시회를 갈 때면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다. 관객들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전시회를 만들고 싶다. 큐레이터로서 추구하는 가치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소통과 공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술 작품의 본질과 메시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면서 더 큰 의미와 가치를 전하고 싶다. 전시회에 오는 관객분들이 공감하고 무언가를 느껴서 오래오래 간직하면 좋겠다.”

첫 단독 큐레이팅 전시회는 제3의 공간(The Third Space) 전시회
첫 단독 큐레이팅 전시회는 제3의 공간(The Third Space) 전시회

앞으로 목표, 비전은? 

“큐레이터로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아시안 이민 역사에 따른 호주 전시회의 변화에 대해 박사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호주는 문화적 다양성이 높은 나라로서, 이를 반영하는 예술 작품과 문화적 활동들이 존재한다. 큐레이터로서의 이러한 예술과 문화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전시회에서 관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는 하는 것이 개인적 목표이다. 

호주와 국제적인 예술 현장에서도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국제적인 전시 및 문화 교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큐레이터로서의 비전이다. 호주와 한국의 예술 가치와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예술 현장에서 창출하고 싶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호주 시드니에 한국적 고유의 미와 미술을 알릴 수 있는 전시회 공간을 언젠가 꼭 만들어보고 싶다.” 

고스포드 아트 프라이즈에서 파이널리스트로 선정되어 전시에 참여했다
고스포드 아트 프라이즈에서 파이널리스트로 선정되어 전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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