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세계보건기구(WHO) 남태평양 지역본부의 14개국을 담당하는 책임자가 되어 그 지역본부가 있는 피지의 수도 수바에 도착했다. 피지는 남태평양 작은 섬나라들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미국, 영국, 중국, 일본,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이스라엘, 한국을 비롯한 10여 개국의 대사관과 많은 유엔기구 지역본부도 상주하고 있었다. 작은 섬나라 바누아투에서 살다 온 나에게는 엄청나게 큰 변화였다. 

얼마 후 통가의 왕인 시아오시 투포우 5세의 생일파티에 초청받아 영국 연방국 통가에 가게 되었다. 왕은 언젠가 『타임스』 표지에 사진이 실려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체구가 거대한 분이었다. 캡틴 쿡이 남태평양에 도착해서 점령한 다른 나라는 모두 식민지화했으나 유일하게 왕정을 인정해 준 나라가 통가였다. 그 이유로는 그들의 통 큰 대접과 친절한 접대 문화 때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통가인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과 하와이 원주민과 같이 폴리네시아인이었다. 피부가 옅은 검은색이었고 여자와 남자 모두 거대한 몸을 가졌다. 

왕의 생신을 축하하듯이 그날은 약간의 바람을 동반한 화창하고 쾌적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초청받은 모든 사람이 들뜬 분위기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더욱 축하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손님 대부분이 피지에 주재하고 있는 각국의 대사 부부들과 유엔 대표들 그리고 왕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다른 작은 섬나라 대표들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초대받은 남태평양 섬나라 왕의 생일 만찬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카바 여흥이 끝나고 통가의 전통 복장인 타파(뽕나무 껍질을 두드려 펴서 만든 천)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통가 전통 무늬와 나무 열매, 조개껍데기로 치장한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의 춤이 흥을 돋우며 한바탕 즐거운 축하연이 벌어졌다. 

식민지풍(Colonial Style)의 하얀 목조 건물로 지어진 왕궁 앞 정원에는 디귿 자로 천막이 세워져 있었고, 중앙에 자리한 음식 테이블 79 에는 온갖 남태평양 음식이 다양하게 차려져 있었다. 테이블 뒤로 통가의 전통복장을 입은 덩치 큰 여인들이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며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게 보였다. 음식이 많았지만 그중 원주민이 주식으로 먹는 타로, 얌, 카사바가 먹음직스러웠다. 이곳 명물인 박쥐요리, 거북알 요리, 거북 살코기 요리는 내가 처음 보는 아주 진귀한 음식이었다. 코코넛 밀크를 넣고 바나나 잎으로 싸서 돌 속에서 몇 시간 동안 구운 통 생선구이와 엄청나게 큰 왕새우 요리, 랍스타 요리는 내가 좋아하는 요리였다. 그리고 흰살생선회를 잘게 썰어 토마토와 양파, 레몬즙, 코코넛 밀크를 넣은 샐러드는 섬나라 별미로 아주 특별한 맛이었다. 섬의 특산 시금치는 우리 시금치와는 달리 코코넛 밀크를 버무려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맛이 났다. 각종 열대 과일로 차려진 잔칫상도 손님들의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상을 장식한 열대 꽃의 색상이 무척이나 화려했다. 

정원 한편에는 장대를 엮어서 만든 임시 바비큐 설비가 있었다. 통가 남자들이 어린 통돼지 구이를 손으로 돌리면서 춤을 추듯 특유한 제스처로 껍질을 툭툭 치며 굽고 있었다. 가볍고 경쾌하게 바삭거리는 소리가 톡톡 울리면서 후각과 미각을 자극하고 입맛을 돋우었다. 바삭한 껍질과 부드러우면서도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속살의 궁합이 입안에서 스르르 녹아들었다. 상상 이상으로 매력적인 맛이라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 나조차도 금세 매료되고 말았다. 

그때 미국 대사 부인이 놀란 얼굴로 테이블에 올라온 거북이 요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어떻게 바다거북을 잡아 요리로 내놓을 수가 있어요?” 

그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거북요리를 거부하고 돌아가니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작은 나라의 왕이지만 최소한 외교단으로서의 예의는 지켜야 했기에 모두 숨죽이며 거북요리를 담아 황급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어색한 시간도 잠시, 의외로 많은 사람이 거북요리를 즐기며 분위기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거북이는 수백 년을 사는 물고기라서 요리로 오르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살코기 맛은 닭고기와 생선 맛의 중간쯤으로 부드럽고 연했으며, 거북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오묘한 맛이 나 의외의 놀라움이었다. 영겁의 나이에도 두꺼운 껍질 속에 감추어진 속살과 알이 어찌도 그리 맛이 있었는지…. 거북요리는 운 좋게 딱 한 번 더 먹을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 남태평양 파티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아마도 해양 어류 보존을 위한 조치가 아니었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통가 왕궁 정원 근처의 나무숲은 박쥐들의 서식처였다. 늘 박쥐 소리로 시끄러웠고 더구나 분비물이 바닥을 온통 뒤덮고 있어서 근처에 갈 수 없을 정도로 냄새가 심했다. 꽃만 먹고 사는 박쥐라지만 아무래도 선입견 때문인지 그런대로 먹을 수는 있었지만 맛을 즐길 수 없었다. 

“왕궁 근처에 서식하는 박쥐는 왕의 소유이고 왕의 허락 없이 함부로 잡으면 벌을 받는대요.”

 식사 중에 프랑스 대사 부인이 살짝 귀띔해 주어 그날의 박쥐요리가 귀한 손님에게 특별히 대접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잔치는 영국 왕실 같은 격식도 화려함도 없었지만, 섬나라 특유의 여유로움, 따스하고 친절한 서비스와 진귀한 먹을거리로 만찬은 화기애애하고 성대하게 막을 내렸다. 나는 자연스럽고 때 묻지 않은 남태평양 사람들의 순수한 환대에 편안한 마음으로 그날의 만찬을 한껏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과식을 한 탓인지 호텔에 돌아 와서 밤새껏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생전 처음 먹어보는 진귀한 요리들로 과식을 했으니 ‘당연히 겪어야 할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자조적인 말로 스스로를 달랬다. 

며칠을 묵는 동안 통가인들의 푸짐하고 따뜻한 대접을 듬뿍 받고 돌아오니, 어린 돼지의 바삭한 껍질과 거북요리는 다시 먹고 싶은 나의 소울 푸드로 남아 있다. 당시 외롭고 힘든 디아스포라의 삶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어 나의 향수를 달래 주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성대하게 잔치가 끝난 후 나에게 충격적인 사실은 섬나라 사람들과 우리의 생활 방식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빈부 격차와는 별개로 섬사람들의 여유로움은 우리 생활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큰 잔치에서도 그들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구분하였는데, 온 부락 남자들이 잔치에 참여하여 협력하는 모습이 내겐 무척 낯설었다. 돌 오븐을 만들어 생선을 굽고 장대 구이 바비큐 틀을 만들어 무거운 고기를 통째로 굽는 일이 온전히 남자들의 몫으로 이해되었다. 여자들은 둘러앉아 담소하며 샐러드 정도를 준비하였는데, 그 모습이 명절 때마다 고된 가사 노동을 하는 한국 여자들의 모습과 겹쳐 보여 자꾸 비교되었다. 

생각해 보니 그곳의 기후가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여유 있고 낙천적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욕심내지 않고 온 동네 사람들이 나누어 먹으며 베짱이처럼 노래하고 춤추던 광경이 지금도 가끔 떠올라 내게 잔잔한 미소를 피어나게 한다. 지금 이곳은 그곳과 전혀 다른 환경이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에 따라 느긋한 여유를 즐기며 사는 동안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자리 한 것 같아 감사하는 마음이다. 나는 그렇게 오늘도 그곳을 그리워한다. 

 

[작가 소개] 김수영

피지에서 15년을 지내고 호주로 이민온 지 22년 된 평범한 주부이다. 엄청난 도약으로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글을 써 본 적이 없어 힘든 일이었지만 글을 쓴 후 맛본 성취감은 카타르시스가 된다”고 밝혔다.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수필 7편 연재

최근 출간된 시드니 동포 여성 7명의 수필집인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한호일보 3월3일자 12면 게재)에서 작가와 출판사의 허락을 받고 수필 7편을 매주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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