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7년 조수미의 CD 6장을 샀다. 전체 101곡이 들어있는데, 그 중 1,2번 CD에는 <크로스오버 히트곡>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크로스오버>가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들어보니 알았다. 지난 17년 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반이 되었다. <크로스 오버>를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경계를 넘는다’는 말이다. 조수미를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로 등극하게 만든 ‘모짜르트의 밤의 여왕’ 과는 결이 많이 다른 노래, ‘이지 리스닝’ 계열로 넘어갔다는 말이다. 

1-1‘보헤미안 걸 : 난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네’, 1-5 ‘시네마 천국 : Cinema Paradiso’, 1-8 ‘프렌치 키스 : Dream A Little Dream Of Me’, 그리고  2-14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이런 노래들을 성능 좋은 스피커로 들으며 커피 한잔을 들고 있으면, 내 마음은 한없이 촉촉해 진다.  그녀는 이 노래들 속에 자신의 꿈과 사랑을 담았고, 나 역시 이 노래들을 들으며 나의 경계를 넘는다. 혹자는 조수미가 나이 들어 전성기 목소리가 나오질 않으니 음악적 외도를 한 것이라 말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그녀의 영혼이 자유로운 거고, 재미 있어서 했을 것이다. 그녀가 만든 유튜브 채널에서 보여주는 허당기를 보면서 나의 생각을 확인한다. 한 인생을 살면서 한 길만 고집하며 살기에는 너무 인생이 아깝다. 100년 전 인간의 평균 수명은 50세. 지금은 100세를 향해 치닫는다. 덤으로 받은 50년을, 어찌 앞의 인생 뒤치다꺼리만 하며 살 것인가?

2. 

이번주 TIME지를 받아 들고는 당황했다. 표지에 내가 모르는 언어가 쓰여져 있다. “EL MUNDO DE BAD BUNNY ; NO VOY A HACER OTRA COSA PARA QUE A TI TE GUSTE”. 배드 버니란 영어는 알겠는데, 나머지는 스페인어다. 1923년 발행을 시작한 후, 여태까지 없던 일이다. 미국 주간지니까 영어를 쓰는 것이 당연한데, 견고했던 관례를 벗어난 까닭은 ‘Bad Bunny’란 가수 때문. 1994년생, 현 29살인데,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 스페인 말을 쓴다. 방탄소년단은 7명의 매력이 합쳐져서 전세계의 인기 몰이를 했지만, 이 젊은이는 혼자서 현 세대 라틴 음악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되었고, 빌보드와 스포티파이를 점령해 버렸다. 젊은 세대를 품어야 하는 TIME으로서는, 그와 그가 쓰는 언어를 품을 수밖에 없었겠지. 1848년, 영어를 쓰는 자들이 캘리포니아~텍사스에 살고 있는 스패니쉬의 후예들을 몰아냈지만, 2023년에는 다시 (문화적으로) 미국 전체를 내 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사실 20세기 최고의 전설적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를 정상에 올려 놨던 것도, 백인인 그가 흑인음악으로 <크로스 오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인종과 언어를 넘나드는 <크로스 오버>는 잠깐의 유행이 아니다. 본적을 찾기 위한 인류의 몸부림이다. 

<위의 표제를 ‘챗GPT’에 번역하라고 시켰더니 이렇게 나온다 . “배드 버니의 세계; 나는 네가 좋아하게끔 또 다른 것을 할 거 없어 / I'm not going to do anything else to make you like it.”>

3.

신앙도 <크로스 오버>가 필요하다. 진리는 배타적 유일성을 가지지만, 나의 한계를 넘어선다. 내가 어찌 하나님의 세계를 다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난 <크로스 오버>하여 세상으로 나간다. 숙명적으로 하고, 재미 있어서도 한다. 내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그래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 인생은 교회당 안에만 있지 않다. 특정한 장소와 건물은 결국 화석화 된다. 견고한 대리석, 고딕식 나무 천정, 천상의 빛을 만들어 내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너무 아름다워, 그 곳을 지키기 위해 머물다 보면, 생명은 떠나고 돌처럼 굳어진다. 예루살렘 성전, 쾰른 대성당, 노틀담 사원처럼 신령과 진리는 사라진다. 관광객들만 들끓는 이교의 전당이 되거나, 결국 무덤이 된다. 지난 코비드 3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4.

경계를 넘나드는 좋은 도구가 인터넷이다. 서핑 하다가 한 파도를 만났다. 이성복의 시.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간 쉴 때 /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 그렇게 소중했던가 /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커피에 있어서, 이제 한국은 세계 2위의 나라가 되었다. 나 역시 커피를 좋아한다. 오래전 학교 앞 다방에 9시 전에 가면 ‘모닝커피’를 줬다. 검은 색 커피에다가 계란 노른자를 넣어준다. 그러더니 노란 색 팩에 든 커피 믹스가 등장했고, 세상은 온통 커피 자판기로 가득 찼다. 이제는 에스프레소를 기반으로 하는 플랫 화이트를 주로 마시는데, 값은 5불 전후다. 그러는 사이 커피 마니아들은 드립커피로 이동 중이다. ‘게이샤’ 같은 최고급은 20불을 줘야 마신다. 그럼에도 여전히 커피믹스를 좋아하시는 분이 계시다. 나 역시 가끔 들이키면 속이 뻥 뚫리면서 젊은 시절이 소환되어 기분이 좋다. 그래서 모든 분들의 취향을 존중한다. 우리 모두는 다 한 하늘아래 사는 독특하고 고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5.

이번 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화제는 상 7개를 휩쓸어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다. 고전 무협영화 ‘와호장룡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 으로 대단히 친숙한 양자경이, 60세 나이에 아시아계로는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녀의 수상 소감이 멋지다.

“여성 여러분, 황금기가 지났다는 말을 절대 믿지 마세요. 이 상을 저희 엄마와 전 세계 어머니들께 바칩니다. 올해 여든 넷, 말레이시아에서 중계를 보고 있을 엄마, 사랑합니다. 트로피 집에 가져갈게요.” 

이 말을 인용 보도하던 한 방송사는 ‘여성’이란 말을 빼 버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아시아인’ 그리고 ‘여성’이 주는 한계를 <크로스 오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혹시 나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조수미의 <크로스 오버>를 다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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