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고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시드니의 하늘은 가을로 가득하다. 사계절의 순환은 겨울 다음 봄인데 봄대신 가을을 맞이하니 역순환이 된 셈이라 당분간 숙려기간이 필요할 것 같다.

호수를 닮은 조용한 호주를 떠나 찾아간 한국은 물결이 높은 바다처럼 격동적인 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출근 길 청춘 남녀들의 행렬이 인상적이었으나 미소를 잃은 무표정한 얼굴이 못내 아쉬웠다.

서울 전철역 에스컬레이터 벽면에 붙어있는 표어가 미소를 자아낸다. "지금 들어오는 저 열차 여기서 뛰어도 못 탑니다. 제가 해 보았거든요."

필자의 젊은 시절 휴전선 부근 큰 길 통행로에 걸려 있던 플랭카드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간다"가 문득 떠올라 시대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때마침 고국에서는 악화되고 있는 한일 관계의 매듭을 풀고자 방일했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찬성과 반대의 구호가 적힌 플랭카드가 전국의 거리에 난무했다.

"한국과 일본의 미래를 향한 진일보"라는 찬성이 있는가 하면 "세일즈맨 1호라는 윤 대통령 월급은 일본서 받아라", "매국노" 등 반대의 막말도 쏟아 지고 있다.

한일 관계를 논할 때 흔히 6백만 유태인 학살의 주범인 독일과 이스라엘 관계를 예시한다. 독일은 2차 대전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태인들에게 사과를 하는데 일본은 왜 사과를 하지 않느냐고 힐난한다.

유태인들은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 않는다"는 신념과 기준을 기반으로 한 ‘지성’으로 독일을 상대한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 잘 잊어 버린다"는 ‘감정’이 앞선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한일 관계는 한국인의 감정만으로 풀 수 없는 난제이다. 왜냐 하면 한일 관계의 정상화는 일본이 호응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사과 하기를 꺼리는가? 필자의 한국에서의 고교 시절 독일어는 전국 고교 제2 외국어의 필수 과목으로 당당하게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심지어 서울 법대 입학 시험에 독일어가 필수 과목이 되기도 했었다. 당시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메스컴을 장악한 유태인들이 제작한 세계 2차 대전 테마의 수많은 영화에서 독일인을 악인으로 등장시키는 한편 독일은 기회 있을 때마다 사과를 하면서 독일 젊은이들의 정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독일은 유럽에서 최고의 경제 부국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한국 고교 교과 과정에서 독일어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혹시 독일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한일 정상화를 위한 방책으로 다음과 같이 한국 정부와 국민에게 건의한다.

1990년 5월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 환영 만찬에서 아키히토 일왕이 "우리 일본에 대해 초래된 불행한 시기, 귀국 사람들이 겪었던 불행을 생각하며, 나는 ‘통석(痛惜)의 염(念) : 대단히 슬프고 애석하게 여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오브찌 일본 수상의 공동 선언문에서 일본 수상의 "일본이 과거 한 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한다"고 공식 문서화했다.

일왕의 반성과 일본 수상의 사죄를 받아들여 일본의 과거 만행을 용서하자. 그러나 그 만행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영원한 이웃 나라인 일본과 미래를 향한 우방이 되기를 기대한다.

용서로는 과거를 바꾸지 못 한다. 하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용서 받는 사람보다 용서 하는 사람에게 훨씬 이로운 삶의 방식이 되듯이 국가와 국가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번 방한 여행에서 고국의 산천이 금수강산임을 실감했다. 한 시간 이상을 달려도 차창 밖 풍경이 변치 않는 호주의 광활한 풍경을 보다가 10분마다 변하는 아기자기한 고국 풍경이 신기했다.

더구나 사계절이 뚜렷한 기온, 풍부한 해산물과 야채, 과일과 산나물이 입맛을 돋운다. 특히 겨울철에만 잡힌다는 거제도 외포항에서 맛본 싱싱한 대구탕과 거제 막걸리의 진미를 잊을 수가 없다.

하루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청와대 관람에 나섰다. 청와대 방문을 하려면 인터넷으로 신청하여 날짜를 지정받아야 한다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해외교포에다 실버족이라는 특권 (?)을 믿고 무작정 청와대 정문에 가서 여권을 제시하니 무사 통과시켜 주었다.

청와대는 마치 어느 절간에 들어선 듯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청와대 본관은 대통령의 집무와 외빈 접견 등을 위한 공관으로 1991년 전통 궁궐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신축했다고 한다.

접견실 벽면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비롯한 11명의 대통령 사진이 비치되어 있고 맞은편 벽에는 프란체스카 영부인을 비롯한 10명의 대통령 배우자들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 시절 최고의 권세를 누리며 호령하던 대통령들도 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했다.

세월호 해난사고로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대통령 관저는 대통령과 그 가족의 거주 공간으로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 행사 공간인 별채, 우리나라 전통 양식의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전남 구례 화엄사 절간을 방불케 했다.

청와대는 해외 동포의 눈으로 보니 호화롭지도 웅장하지도 않는 아담한 신궁이라 할까? 맞은편 고궁인 경복궁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세계 상위권의 고물가 지대에 살고 있는 시드니 시민이 놀랄 정도로 한국의 음식 값이 수직 상승하는 실정을 보며 호주로 귀국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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