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비처럼 눈송이처럼 고요히 춤을 추는 곳. 겨울 안개가 땅에 깔리면서 벽을 타고 커다란 목화솜처럼 덩어리로 뭉치는 그곳. 석호는 삶과 죽음의 냄새를 동시에 풍겼다. 그리고 약속과 부패의 냄새가 유기적으로 납작하게 얽혀 있었다.”라는 소설 속의 습지 묘사에 흠뻑 빠져 나는 한동안 소설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남편이 델리아 오언스의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말없이 내밀었다. 그의 배려로 나는 주인공 카야를 따라 환상이면서도 실체일 것만 같은 노스캐롤라이나 습지의 원시성으로 삽시간에 빠져들었다. 거의 인간이 살 수 없을 정도의 야성을 간직한 원시 습지는 함부로 근접할 수 없는 첫사랑의 기억처럼 설렘과 동시에 아픈 가슴앓이를 시켰다.

그때 호주답지 않은 기상 이변으로 수십 일간 내리는 우울한 빗소리는 소설 속의 습지를 떠도는 물소리, 바람소리, 갈매기 울음소리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환상교향곡을 연주했다.『타임스』베스트셀러이며 아마존 판매 순위 1위인 이 책이 ‘미국의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는 게 이해가 되고도 남을 만했다.『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벌이는 서정적인 로맨스이면서도 아찔한 미스터리로 가득 찬 생생한 습지 탐구생활 보고서이다. 또한 가슴 아픈 야생 소녀 카야의 고립이 두 남자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인간의 야만적인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흥미진진한 살인 미스터리이기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름답고도 야생미 넘치는 기이한 풍광 속에 홀로 살아가는 야생소녀 카야의 문제는 고립이었다. 작가는 그 고립이 카야에게, 아니 인간에게 과연 필요한 것일까를 반문하고 있다. 카야는 인간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그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그녀는 인간들에게 버림받고 사귀던 남자에게서는 사랑의 배반을 당한다. 자연을 벗 삼아 홀로 일어서는 그녀는 점점 강인함을 배워 더 이상 외롭지 않지만 작가는 야생 소녀 카야의 홀로서기를 찬양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외로움이라는 화두를 철저히 배격한다.

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과 거의 평생을 지나온 작가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외로워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작가는 나아가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급을 질타하는 차별과 편견이 가득한 사회를 비난한다. 카야에게서 우리는 자신의 일부를 읽는다.

고립된 채 습지에서 살아가는 소녀 카야는 두 소년을 통해 여자로서의 성숙과 사랑을 배워 간다. 좋아하는 소년에게 강렬한 이끌림과 밀어냄을 동시에 느끼며 첫사랑에 빠져드는 카야의 점진적인 감성 묘사는 가히 예술적이다. 여성이 아니고서는, 아니 델리아 오언스가 아니면 절대 묘사할 수 없는 성장통을 겪는 소녀의 감정의 변화를 먹이를 찾는 매의 눈으로 날카롭게 집어낸다. 카야는 성장과 번민을 거듭하며 서서히 소녀의 탈을 벗는다. 그러나 카야와 관계했던 한 소년(거의 청년이 되어 가는 나이의)이 살해되며 사건은 미궁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던 중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받았던 카야는 무죄로 풀려나고 그녀의 인생이 순항하는 줄 알게 된 순간, 거듭되는 반전의 쾌감이 독자를 극도로 사로잡는다. 흠을 잡자면 마지막 법정 공방이 서둘러 넘어가는 느낌이 들지만 많은 부분 습지를 살리려는 작가의 노력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을 정도이다.

일흔이 넘어 첫 소설을 쓴 델리아 오언스는 여성 동물학자로 『네이처』, 사이언스』등 세계적인 저널에 논문을 수차례 기고했으며, 아프리카에서 23년 동안 야수를 길들이며 살아온 야생마 같은 여성이다.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해서인지 생태학자로서 지금껏 봐 온 습지와 자연 그대로의 야생을 소설에 가득 담아 원시성과 서정성이 흘러넘친다. 소설의 제일 중요한 배경이 되는 습지는 어쩌면 배경이 아니라 제일 상징적인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습지를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는 생명력의 상징으로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출산시켰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녀의 인생 자서전이자 꿈이 혼합되어 이루어 낸 습지라는 인생 무대이자 광장이다. 놀랍게도 그 광장은 외롭고도 사랑스런 자연 속 이야기로, 검은 진흙처럼 끈질긴 생명 이야기로 가득하다. 

근간 들어 이렇게 아름답고 아찔한 소설을 읽은 적이 없기에 마지막 부분을 아껴 두고 읽고 싶었다. 맛있는 사탕을 숨겨 둔 아이처럼 한참 후 책을 다시 펼쳐 보았다. 그 순간 주인공 카야가 조각배로 누비던 잿빛 광활한 습지가 파노라마처럼 어른거린다. 그 광활한 야생을 누비며 가재와 울고 웃고 노래하던 나는 이제 내 자리로 돌아올 때이다. 그러나 나도 이제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다. 카야가 사는 미치도록 아름답고 비밀스런 습지가 이미 내 마음 한구석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다. 

책을 덮을 때쯤 자연이 인간이 세상이 모두 달라 보인다. 그것들이 내 앞에서 빛을 내며 눈을 깜박이고 있다. 그 사이로 습지의 하늘이 눈을 뜬다. 낮이 따스해지고 하늘이 윤을 낸 듯 반짝거린다. 나는 시를 읊듯 꿈을 꾼다. 그런데 이 소설이 기교면에서 현대소설의 기법이나 문장의 세련미와는 무관한 고전적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저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것은 작가가 동물학과 생태학을 공부해 아프리카에서 평생 얻은 산 체험으로 인간을 애정의 눈으로 볼 수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소녀 카야의 성장소설이자 살인과 법정 스릴러가 어우러진 로맨스 소설이다. 

여태 카야의 깊은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녀는 그의 온기를, 그 남자와 그 바다 냄새를, 함께 있는 그 순간을 깊이 들이마신다. 어둠이 달콤한 향내를 내며 습지에 드리운다. 그는 그녀의 첫사랑 그 이상이었다. 그녀에게 그는 시간의 한 갈피였고 스크랩북에 붙인 사진이었다. 카야는 그렇게 남자를 기억하며 습지의 조각배 위에서 편안히 마지막 눈을 감는다. 자연이었던 그녀는 자연의 품으로 편안하게 돌아간다. 

나 언젠가는 ‘가재가 노래하는 그곳’에 가 보고 싶다. 거기서 습지라는 별명을 얻은 ‘마시 걸(Marsh Girl)’ 카야를 찾아 마냥 모래톱을 달려 볼 거다. 이 겨울 마른 풀들은 패잔병처럼 고개를 숙인 채 물을 바라보고, 혹독하게 몰아치는 소란스러운 바람은 쇠락한 거친 줄기를 흔들고 지나가겠지. 갈색 풀들의 왁자지껄한 함성이 마왕의 습격 같아 두려움에 나는 갑자기 숨이 차오른다.  

노래하듯 규칙적으로 쓸려 오고 밀려가는 물살에 조개가 깎이고 짜개져 고운 모래가 되고, 그 모래는 카야의 몸을 애무하는 이중주를 연주한다. 책장을 덮는 순간 광채로 하얗게 빛나는 카야의 희미하지만 밝은 모습에 적이 안도한다. 여전히 습지는 고독하고 위대한데..

* 델리아 오언스, 201 9, 『가재가 노래하는 곳』, 살림.

이혜인 삽화
이혜인 삽화

 

작가 소개 : 이마리 

이마리는 차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작가로 제 3회 한우리 문학상 대상으로 출간한 장편동화『버니입 호주 원정대』와『코나의 여름』『구다이 코돌이』등이 ‘세종 우수 도서’로 선정됐다. 장편 역사소설로『소년 독립군과 한글학교 』는 ‘아침 독서 도서’로 선정, 『동학 소년과 녹두꽃』『대장간 소녀와 수상한 추격자들』에 이어 한국전쟁 시리즈 출간을 앞두고 있다. 

동화『빨강양말 패셔니스타』를 비롯 최근 출간한『캥거루 소녀』는 2022년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됐다. 공동 수필집『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을 출간했으며 센트럴 코스트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연재를 마치며.. 

한호일보에 7회 연재된 수필집 <시드니 할매's  데카메론> 은 시드니 작가들의 다른 저서와 함께  K Mall 에 비치되어있습니다.

그동안 할머니들의 글을 사랑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필자 주(註)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