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국민배우 배리 험프리스(출처: ABC)
호주 국민배우 배리 험프리스(출처: ABC)

멜번 태생의 연극인이자 화가, 시인, 작가로 가상 캐릭터인 에드나 에버리지 여사(Dame Edna Everage)와 레스 패터슨 경(Sir Les Patterson)을 만들어내고 이를 연기해 온 호주 국민배우 배리 험프리스(Barry Humphries)가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시드니 세인트 빈센트 병원에서 아내 리지 스펜더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골반 골절 합병증으로 22일 타계했다.

가족들은 성명을 통해 험프리스가 "무대에서의 활동으로 가장 기억될지 모르나 그는 모든 형태의 예술을 애호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사랑스러운 아버지, 할아버지, 친구이기도 했다"면서 "그의 별세는 많은 이들의 삶에 공허함을 남겼다"고 밝혔다. 

앤소니 알바니지 총리도 험프리스가 절대적으로 독보적인 훌륭한 작가이자 풍자가였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고 피터 더튼 야당대표도 호주가 이날 탁월한 재담가인 희극인 한 명을 잃었다면서 그를 추모했다. 

데임 에드나 에버리지 캐릭터를 만든 배리 험프리스 (출처: ABC)
데임 에드나 에버리지 캐릭터를 만든 배리 험프리스 (출처: ABC)

에드나 여사 캐릭터를 앞세운 예리한 통찰력으로 호주 사회를 관찰해 온 험프리스는 일례로 지난 2007년 케빈 러드 총리 취임 당시 "우리는 치과 의사처럼 생긴 사람을 총리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가"라는 유머를 던져 관객들을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유명 인사들에 대한 무자비하고 신랄한 위트의 이면에는 호주에서 모든 사람들은 동등하다는 그의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

험프리스는 멜번 무니폰즈(Moonee Ponds)에 사는 보라색 머리 고상한 억양의 개신교 주부 캐릭터인 에드나 여사가 호주에서 인기를 끌게 된 계기에 대해 "오랫동안 영국과 미국의 정형화된 등장 인물만을 본 관객들이 마침내 자신들과 친숙한 인물을 접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캐릭터 속 남편 이름인 놈 에버리지(Norm Everage) 역시 그녀가 평균적 호주 가정의 주부임을 나타내는 장치이다. 

그가 만들어낸 또 다른 코믹 캐릭터인 레스 패터슨 경은 의도적으로 에드나 여사와 상반된 요소들을 동원해 무례하고, 상스러운데다 호색한에 알콜중독자인 시드니 출신 가톨릭 남성으로 묘사됐다. 

1934년 멜번의 큐(Kew)에서 4남매 중 첫째로 태어나 캠버웰(Camberwell)에서 성장한 험프리스는 캠버웰 그래머와 멜번 그래머를 거쳐 멜번대에서 법학과 철학, 예술을 공부했다. 그는 멜번대 재학 시절 전쟁 중 광기와 파괴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돼 전통적 가치와 예술 형태, 이성에 대한 불신과 파괴를 주창한 반문명, 반합리주의 예술 운동인 다다이즘(Dadaism)에 심취해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지만 멜번대는 50년후 험프리스에게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에드나 여사를 무니 폰즈에 거주하는 주부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선 "캠버웰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라는 다소 난해하고 엉뚱한 답변을 남겼다.

레스 패터슨경 캐릭터의 배리 험프리스 (출처: ABC)
레스 패터슨경 캐릭터의 배리 험프리스 (출처: ABC)

그는 1982년 호주국민훈장(Order of Australia) 오피서(Officer) 등급과 2007년 대영제국 지휘관훈장(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을 수여받았으며 각각 영국과 미국의 연극 및 뮤지컬 무대에서 최고의 배우들에게 주어지는 로렌스 올리비에상(Laurence Olivier Award)과 토니상(Tony Award)을 수상했다. 

TV 출연 작품으로는 데임 에드나(Dame Edna) 토크쇼와 ABC 시리즈 플래쉬백(Flashback), 영화 출연작으로는 1970년대 제작된 두편의 배리 맥켄지(Barry McKenzie) 시리즈와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록키 호러 픽쳐쇼 2 쇼크 트리트먼트(Rocky Horror sequel Shock Treatment) 등이 있다.

멜번에서 태어나 멜번을 사랑하고 특히 멜번 건축 유산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던 험프리스는 2004년 캠버웰역 재개발에 분노했고, 2010년에는 페더레이션 스퀘어 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현대적 건축물의 확산은 '멜번의 파괴(destruction of Melbourne)'를 의미하는 것이라면서 "한때 멜번의 번영을 상징하던 아름다운 거리였던 콜린스 스트리트는 이제는 멜번 탐욕의 상징이 되버렸다"며 개탄했다. 자신의 청동상이 설치돼있던 도크랜스(Docklands)에 대해선 "멜번에서 홍등가로서나 적합한 곳"이라고 폄하했는데 동상은 이후 철거됐다.

2017년 ABC 방송과 인터뷰를 한 배리 험프리스 (출처: ABC)
2017년 ABC 방송과 인터뷰를 한 배리 험프리스 (출처: ABC)

21세 때 무용수인 브렌다 라이트(Brenda Wright)와 결혼했지만 불과 1년 후 이혼했고, 두번째 부인인 로살린드 통(Rosalind Tong)과의 결혼생활은 11년간 지속됐다. 하지만 이 기간 자신은 상당 기간을 알콜중독 상태로 보냈다고 그는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30대 중반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세번째 부인이었던 다이앤 밀스테드(Dianne Millstead)와의 10년 남짓 결혼생활 후, 1990년대 이후로는 영국의 유명 시인이자 작가로 강한 사회적 의식의 작품들로 유명하고 기사 작위를 받기도 한 스티븐 스펜더 경(Sir Stephen Spender)의 딸인 네번째 부인 리지 스펜더(Lizzie Spender)와 함께 살아왔다. 

공교롭게도 여성 캐릭터인 에드나 여사를 연기하면서 세계적 스타덤에 오른 험프리스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비우호적 발언으로 최근 몇년간 캔슬컬처(Cancel Culture)의 표적이 되었다. 그는 지난 2016년 영국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성전환자들에 대한 적대적 행동을 폭행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성소수자들의 주장에 대해 "몰염치하다(ratbaggery)"고 평가하는가 하면 성전환수술에 대해선 "자해(self-mutilation)" 행위라면서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이에 세계적 권위의 멜번 인터내셔널 코미디 페스티벌은 최고상인 배리상(Barry Award)’의 이름을 변경했다. 1987년 이 행사를 런칭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던 험프리스는 처음엔 자신의 발언이 맥락에서 벗어난 것이었다고 강변했으나, 이후 무차별적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에서 자신에게도 누군가를 모욕할 권리가 있다며 입장을 선회했다.

배리 험프리스 (출처: A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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