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신문을 보며 아침을 기다리는 노부부.
카페에서 신문을 보며 아침을 기다리는 노부부.

기온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얼마 전까지 가벼운 옷을 입고 지냈는데, 긴팔을 찾는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무의식 속에 한국 겨울에 대한 향수가 있어서일까, 추운 곳을 찾아가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추위를 맞볼 수 있는 지역은 근처에 없다.

문득 우리 집에서 1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글로스터(Gloucester)라는 동네가 떠오른다. 가까운 곳이라 몇 번 가 보았다. 겨울이면 눈이 내리기도 하는 배링턴 탑 국립공원(Barrington Tops National Park) 입구에 있는 작은 동네다. 인구는 2,000명을 조금 넘는 정도다. 추위를 맛볼 수는 없어도 서늘한 날씨는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걸을 만한 장소는 글로스터 관광안내소에서 알아보기로 했다.

요즈음 구름이 오락가락하며 비를 뿌리는 날씨의 연속이다.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은 비가 올 확률이 낮다. 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산으로 들어가면 비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고 와도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내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배링턴 탑 국립공원(Barrington Tops National Park)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배링턴 탑 국립공원(Barrington Tops National Park)

아침에 일어나 밖을 보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비구름이 오락가락한다. 산속의 해는 일찍 떨어진다는 오래전 소설에서 읽은 구절이 떠오른다. 서둘러 물 한 병 챙기고 집을 나섰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시골길에 들어선다. 높고 낮은 산들로 둘러싸인 계곡 사이를 달린다. 창문을 열었다. 적당하게 싸늘하고 신선한 바람이 온몸을 쓰다듬는다. 녹색으로 뒤덮인 산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집을 나서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도로변에 있는 전망대에서 사진도 찍으며 글로스터에 도착했다. 여행 안내소를 먼저 찾았다. 산책(Walk)이라고 쓰인 팸플릿이 많다. 팸플릿 앞에서 서성거리는 데 직원이 도움을 원하느냐고 묻는다. 걷기 좋은 곳을 찾는다는 나의 말을 듣고 지도를 보여주며 갈만한 곳을 알려준다. 직원이 무척 친절하다. 한마디 질문하면 서너 개의 팸플릿을 가지고 와서 설명한다. 서비스 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 왜 이렇게 친절한가, 손님이 많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직원의 조언대로 카페에서 점심을 챙겨가기로 했다.

산책로 주변에는 이끼로 뒤덮인 고사한 나무가 많다. 
산책로 주변에는 이끼로 뒤덮인 고사한 나무가 많다. 

가게와 카페가 줄지어 있는 동네 한복판은 평일 아침이지만 활기에 넘친다.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주위를 기웃거린다.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하는 그룹이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삼삼오오 음식을 앞에 놓고 이야기 나누는 동네 사람도 많다. 식탁에 앉아 있는 노부부가 인상적이다.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와 빨간 셔츠를 입은 할머니가 애완견을 데리고 주문한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 시골에서 큰 욕심 없이 세월을 보낸 삶이 엿보인다.

샌드위치를 받아 들고 여행 안내소에서 추천한 공원(Copeland Tops)으로 향한다. 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주차할 장소가 없을 정도로 자동차가 많다. 관광버스 주차장까지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지라는 생각이 든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도로 주변에 주차하고 공원에 들어선다. 

이곳에는 두 개의 산책로가 있다. 짧은 산책로는 2시간, 긴 산책로는 4시간 걸린다는 안내판이 있다. 짧은 산책로를 택했다. 산책로 이름이 흥미롭다. 감추어진 보물(The Hidden Treasure Loop Track)이라는 이름이다. 무슨 보물일까, 추측했던 대로 이곳에는 금광이 있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금광을 둘러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맞지 않는다.

거대하지 않지만,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계단식 폭포.
거대하지 않지만,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계단식 폭포.

하늘이 보이지 않는 무성한 숲속을 나 홀로 걷는다. 계곡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작은 폭포들이 앙증맞게 물을 떨어뜨리며 존재감을 나타낸다. 한여름이라면 물에 발을 담그며 지내기에 최적의 장소다. 아주 오래전 자주 다녔던 도봉산 계곡을 떠오르게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금광이 보인다. 지금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는 금광이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1877년에 금광이 들어섰다. 규모는 작아 보인다. 그러나 이곳에서 269kg의 금을 채굴했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두 번째로 많은 금을 채굴했다는 설명이 덧붙여 있다. 금광을 벗어나 조금 걸으니 아이들과 함께 온 그룹이 보인다. 뉴캐슬(New Castle)에서 왔다는 모녀와 인사를 나누기도 하면서 산책을 끝냈다.

다음 목적지는 배링턴 탑 국립공원에 있는 글로스터 톱스(Gloucester Tops)라는 곳이다. 한 시간 이상 운전해야 하는 먼 길이다. 서둘러 떠난다. 가는 길은 포장이 잘되어 있다. 그러나 급경사와 커브가 심하다. 높은 산이 많기 때문이다. 산을 넘어가는 도로에서 바라보는 차창 밖 풍경이 멋지다. 드라이브 코스로 추천하고 싶은 아름다운 도로(Scone Road)다. 

소 떼가 도로를 막고 있다. 
소 떼가 도로를 막고 있다. 

국립공원에 들어서니 비포장도로가 시작된다. 도로변에서 풀을 뜯는 소가 많다. 자동차를 많이 보아서일까, 지나가는 자동차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 강물을 건너야 할 때도 많다. 그러나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가 물을 건널 수 있게 콘크리트 도로를 조성했을 뿐이다. 도로 위로 강물은 흘러가고 있다. 강수량이 많으면 자동차도 다닐 수 없는 도로다.

이번에도 강을 건너야 하는 도로를 만났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도로에 소가 떼를 지어 있는 것이다. 소들은 비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혹시 소가 달려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난감해하고 있는데 뒤에 자동차가 왔다. 작업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동네에서 일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창문을 열고 뒤를 돌아보니 가까이 가면 소가 비켜줄 것이라고 한다. 

소 떼를 향해 천천히 돌진(?)했다. 조금 비키는 것 같던 소가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다. 난감해하고 있는 나의 모양을 본 뒷사람이 자동차를 한쪽으로 비킨다. 자기가 먼저 가겠다는 신호다. 후진하여 뒤에 있는 자동차를 먼저 가게 했다. 뒤에 있던 자동차는 거침없이 소를 향해 운전한다. 비키지 않는 소를 조금씩 건드리기도 하면서 다리를 건넌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소 떼를 지나 그림 같은 초원을 가로지른다. 가파른 비포장 산길을 한참 운전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산책로가 10개 이상 있다. 그러나 늦은 시간이다. 폭포가 있다는 산책로(Glocester Falls Track) 하나만 둘러보기로 했다.

글로스터(Glocester)를 찾아가는 도로에서 바라본 풍경.
글로스터(Glocester)를 찾아가는 도로에서 바라본 풍경.

주차장에 도착하니 두 대의 자동차만 덩그러니 주차해 있다. 늦은 시간이어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산속이라 날씨도 약간 서늘하다. 점퍼를 걸치고 한 시간 걸린다는 산책로를 걷는다. 조금 들어서니 전망대가 있다. 수많은 산이 지는 햇빛을 받으며 출렁거린다. 시야가 넓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음까지도 넓게 열어준다. 

산책로를 따라 숲으로 들어간다.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폭포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큰 폭포는 아니다. 작은 폭포들이 계단식으로 떨어지며 나름의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폭포까지 내려가 보았다. 청년이 삼발이에 큼지막한 카메라를 고정해 놓고 폭포를 담고 있다. 상류에서는 젊은 여자 혼자 주위 풍경을 둘러보고 있다. 같이 온 남녀일 것이다. 간단히 손 인사를 주고받은 후 주차장으로 향한다.

주차장에는 작고 오래된 자동차 한 대만 주차해 있다. 폭포에서 만났던 청춘남녀가 타고 온 자동차일 것이다. 조금 있으면 해가 떨어질 것이다. 오늘 숙박은 어디서 할까. 은근히 걱정된다. 그러나 인사를 나누던 해맑은 표정이 떠오른다. 걱정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풍경과 하나 되어 현재의 삶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는 청년은 이미 노인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고갱이 남긴 말이라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고갱은 일생을 청년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고갱의 삶을 흉내 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노인의 삶이 아닌, 청년의 삶을 꿈꾸어 본다. 어리석은 삶을 꿈꾸어 본다.

지금은 폐쇄된 금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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