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로부터 아버지가 위독하셔서 급히 한국을 가야 한다는 전화를 받던 날이었다. 할머니라 불리우고 있는 노년의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울먹이며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충격에 가까운 시제의 혼란이 왔다. 급기야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계셨어?”라는 예의 없는 경망스러운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아주 오래전 인생이 채 여물기도 전에 부모와 사별한 나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라고 변명해 본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그녀가 돌아왔다. 말로는 위로와 애도를 전하면서도 애통한 마음을 함께 나눌 수는 없었다. 나보다는 몇배의 긴 세월을 아버지와 함께 이세상에 살았었던 그녀에게 부러움이 앞섰기 때문이리라.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지와의 이별의 순간을 말해주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울고 있는 그녀를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셨다고. 눈빛이란 마음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고 수많은 말들이 함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눈물을 글썽이던 나의 눈물은 사십 여년 전에 아버지가 남겨준 사랑의 눈빛을 찾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큰언니로부터 한탄강유원지에 민박집을 빌려 놓았으니 모두 모이자는 연락을 받았다. 이미 출가한 언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편안한 시간에 각자 가기로 하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 그 즈음 아버지는 몇 년 전의 처참한 사업실패로 인한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1년이 10년이라도 된 듯 새치머리는 백발이 되고 한겨울 벌판에 홀로선 나목처럼 힘겹고 쓸쓸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몇 년 만에 자식들이 모인다는 말에 봄기운에 물기가 오르듯 메말랐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왕년의 실력을 발휘해서 큰 잉어를 몇 마리 잡아 자식들 보양식을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들떠서 장비를 챙겼다. 나는 제법 무거워진 배낭을 지고 투망과 낚싯대를 들은 아버지와 함께 연천행 버스를 탔다. 어딘 가에 내려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샛강변의 버드나무 아래였다. 등짐을 내려 놓기가 무섭게 수정처럼 반짝이는 물보라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투망을 던지는 아버지 곁에서 투망도 던져 보기도 하고 망에 걸려있는 작은 물고기들도 주워담으며 즐겁고 특별한 아버지와 둘만의 피서를 즐겼다. 그림자들이 길어져 갈 때쯤 아쉬운 마음을 남기고 샛강을 떠나 임진강으로 향했다.

 우거진 숲길을 헤치며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한탄강유원지가 멀리 보이고 강물이 휘돌아 흐르는 절벽 위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청히 서 있는 나와는 달리 아버지의 손길은 분주했다. 해지기 전에 밥을 먹어야 한다며 샛강에서 잡아온 물고기 중에 모래무지만 골라서 손질한 후 밀가루를 묻혀 끓는 물에 넣고 양념을 한 뒤 남은 밀가루를 수제비로 떠 넣었다. 아버지가 요리하는 모습도 처음 보았지만 익숙한 손놀림에 더욱 놀랐다. 그리고 맛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산등성이에 길게 누워있던 노을이 잠들며 사라지고 유원지의 불빛이 반딧불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낚싯대는 부여잡고 있었지 거친 물살에 잉어는 못 잡고 미끼만 사라졌다. 실망과 지루함을 멀리 보이는 불빛아래에서 즐겁게 놀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며 달래고 있었다. 어느덧 그 불빛들도 하나 둘 꺼져가기 시작했고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듯 마지막 불빛도 사라졌다. 이 세상에 아버지와 나만이 깨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아버지는 조그만 등불을 켜고 내 잠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밤새 낚시를 하다가 앉아서 잠깐 눈을 붙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왔는데 매트까지 준비한 아버지가 바람을 넣고 있었다. 그리고 매트 가장자리에 고랑을 파고 담배가루를 뿌렸다. 뱀을 방지하는 방법이라는 말에 나는 복병을 만난 듯 당황스럽고 무서웠다. 지금까지 나의 적은 졸림과 지루함 뿐이었는데 뱀이라니. 나는 잽싸게 담배가루의 경계선만으로 들어가 누웠다. 졸음은 멀리 달아나고 나의 눈동자는 사방을 휘저으며 돌아다녔다. 

홑이불을 여며주며 걱정 말고 자라는 아버지 말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가시지 않는 불안감에 실눈을 뜨고 보니 곁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눈이 보였다. 물기어린 눈동자는 슬프게 반짝였다. 팔남매 늦둥이로 태어난 나와 동생을 덤이라고 부르던 아버지. 그 덤들을 오래 지켜주지 못할 것 같은 예감으로 슬픈 듯, 말년의 실패로 고생시켜서 미안한 듯한 눈빛. 하지만 무엇보다도 크게 보이는 것은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아래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심신이 노쇠한 아버지를 보호하겠다고 함께 떠났지만 오히려 잊히지 않는 따스한 아버지의 보살핌과 사랑의 추억이 됐다. 잉어가 한 마리도 없는 텅 빈 바구니로 가족들과 합류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하는 마지막 피서는 행복하고 즐거웠다.

 팔남매 중 그 누구도 안아본 자식이 없었다는 무뚝뚝한 아버지. 벽을 문이라고 우기다가 결국 뚫어 놓고야 만다는 고집이 센 아버지. 사랑한다는 말은 영화속에서나 하는 대사일 뿐이라며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옛날 아버지. 하지만 그날 밤낚시를 하며 보았던 아버지의 사랑의 눈빛은 말로 하지 않았던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내 가슴에 심어주었다. 아버지는 항상 그런 사랑의 시선으로 자식들을 바라보며 살았으리라. 그 후 두세번의 여름이 지난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또 그 다음해에 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지 대신 오빠의 손을 잡고 입장하면서 나는 울지 않았다. 내 가슴에 남은 아버지의 사랑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파산한 아버지로부터 물질적 유산은 없었지만 그 사랑의 눈빛은 따스한 이불처럼 때로는 소낙비를 막아주는 우산이 되어 남아있다. 먼 훗날 나의 자식들에게 나의 사랑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노을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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