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째 인사를 나누는 나무가 있다. 아픈 손가락인 셈이다. 산책을 시작했던 초창기에는 여느 나무처럼 서 있었다. 특별히 눈이 가지 않았던 이유다. 심한 태풍이 다녀 간 다음 날, 홀로 뿌리를 다 드러내고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가슴이 철렁했다. 뿌리 몇 가닥이 아직 땅 속에 묻혀 있기는한데 살아남으려나 안타까워 매일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잎파리가 마르지 않고 있으니 일단 안심은 되었다. 나무가 그 상태로 살고 있는 모습에서 나를 본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는 추운 겨울에 맞았다. 털장갑에 두툼한 목도리를 두르고 꽁꽁 언 길 위를 조심조심 걸어 성당으로 향했었다. 마침 첫 눈까지 오는 해에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희망을 가득 품곤 했던 추억을 몸이 기억한다. 호주 도착 후 제일 힘든 일이 생겼다. 너무 더워 해변에서 지내야 했던 첫 해에는 무엇이든 새롭게 느껴졌다. 해가 거듭될수록 반바지 차림의 산타할아버지를 내 아이들은 자연스레 쳐다보는데 내 몸이 받아들이지 못해 낯설기만 했다. 결국 십 년을 넘게 버티다 12월이 되면 한국 나들이하는 것으로 나를 달래주었다. 서서히 그렇게 겨울과 여름을 넘나들다가 이제서야 겨우 내 몸이 더운 성탄절에 낯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에서 몸에 익었던 날씨, 언어, 문화를 뒤로 하고 사회초년생인양 새로 구축해가야하는 과정이 쉬울 수 있었겠는가. 누워 사는 나무가 그렇게 정상으로 회복되듯 나의 이민 생활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했다. 

 얼마 전 화창한 목요일, 시드니에서 열린 ‘설치 미술가 서도호’의 개인전을 다녀왔다. 작가 자신이 어릴 적 살았던 성북동 한옥을 실물 크기 그대로 옮겨 놓은 아래층 전시관에서는 몸이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그 집 외벽 전체에 종이를 붙이고 일일이 손가락으로 문질러 본을 떴다. 그리고 떼어 내어 완성했다는 설명이다. 속이 텅 비어있는 그 종이집을 직원 네 명이 사방에서 지킨다. 멀찍이 떨어져 놓여진 긴 의자에 앉아 넋 놓고 바라본다. 이 전시관을 나서면 코 앞에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보인다는 사실도 잊은 채, 한옥에 빠져들어 마음은 이미 어린 시절 고향으로 와 있다. 디딤돌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동그란 문고리에 둘째 손가락을 넣어 잡아 당긴다. 열려진 방문 안에 엄마가 차려준 밥상이 보인다. 둘러 앉은 식구들 속에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도 함께다. 올망졸망 형제들이 조잘대며, 구운 김을 하얀 밥 위에 얹는 숟가락들이 분주하다. 그 때는 하루가 천 년 같아 언제 어른이 될 수 있나 막연해 했던 기억이다. 순식간에 어린 시절이 가 버릴 줄도 모르고. 가물가물 했던 원가족의 한 자리 모습을 또렷하게 보는 순간 잠깐이어도 미소가 절로 머금어진다. 

‘집은 개인적 공간인 동시에 문화의 결정판’이라고 말하는 작가 서도호는 서울을 떠나 런던, 뉴욕에서 생활하면서 문화 차이를 작품에 녹여내려 했다. 그의 마음이 내게 전해져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어릴 적 살았던 혜화동 한옥이 떠올라서였을까?  나도 덩달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내가 살고 있는 호주 주택에 한옥을 겹쳐 느껴 보았다.  

나의 고향을 느끼게 해주려고 이 전시회 표를 선물해 준, 호주에서 자란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건물을 떠나려는데 아쉬움이 밀려온다. 전시회가 끝나면 그 아름다운 한옥은 흔적도 없이 시드니를 떠나겠지. 마치 내 어린 시절이 없어지기라도 하는 듯한 안타까움에 한 번 더 느껴보고파 전시회 마지막 날 다시 찾았다. 보고 또 보고, 기억 창고에 넣고 또 넣고, 그렇게 안간힘을 써 본다.

 오늘 새벽 산책길엔 보름달이 동행한다. 여명에 집을 나섰으니 아직 달이 빛을 발한다. 태양이 조금씩 떠오르며 보름달은 점점 옅은 빛으로 자리를 내어 준다. 달과 태양 아래 옆으로 당당히 누워있는 나무를 또 만난다. 몸통을 굳건히 땅에 뉘인 채 아랑곳없이 가지들은 하루가 다르게 하나씩 하늘을 향해 서기 시작했더니 계절이 바뀔 때면 꽃도 피워낸다. 뿌리를 공중에 드러내고도 해와 달의 도움만으로 제법 서 있는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어 자세히 보지않으면 다른 나무와 다름이 없어보인다. 서울 혜화동을 떠나 이 곳 시드니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은퇴 후 생활을 즐기고 있는 나를 이 나무에서 다시금 본다. 나의 뿌리를 못 느낄 때 호주에서의 삶이 공중에 떠 있는 줄 알았다. 사실 그렇게 뜬 채로 살아가는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땅 속에 묻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뿌리가 없는 나무는 결국 죽는다. 큰 뿌리를 고향에 두고 온 듯한 나에게, 붙어 있는 몇 가닥 뿌리는 문학회였다. 한글로 글쓰기를 할 수 있어 그것이 나를 호주 땅에서 여느 나무처럼 바로 서게 지탱해주는 큰 힘임을 어찌 모르랴.

차수희(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