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꿈쟁이 나의 영혼은 내가 잠든사이 제멋대로 육신을 빠져나가 낯선 곳을 헤매며 나의 애간장을 태웠다. 집 밖으로 나간 호기심투성이의 감성은 날개 옷으로 갈아 입고 여기기웃 저기기웃 잿빛의 세상이 궁금하다. 침대에 누워서 돌아오라 외치는 추상같은 이성의 명령은 그저 종이 호랑이 일뿐이다. 

나는 아직도 애칭 아가라고 부르는 어리버리 열아홉살 작은 아이를 옆에 태우고 지그재그 바다로 난 길을 향하여 카 레이서가 무색할 정도의 스피드로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이내 아스팔트 도로가 물에 잠겼다 보였다 하다가 저 멀리 하늘로 치솟은 도로의 끝에서는 길이 끊어져 자동차들이 심연의 물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달려버릴까.. 노심초사 이성에게 어깃장을 놓아 보았지만 철없는 감성도 아이가 다칠까 걱정스런 마음 앞에선 어미의 마음이 되는가 보다. 그대로 멈췄다.

 새해 다섯째 날 작은 아이가 두번째 운전면허 시험을 보는 날이다. 햇수로는 지난해12월24일, 날 수로는 열이틀 전의 불합격에 재도전을 하는 것이다. 시험에 합격해서 친구들과 여자친구 앞에서 자랑하고, 축하 받는 특별한 성탄을 맞이하고 싶다며 들떠 있다가 첫번째 시험에 참패를 당했다. 

그날의 RTA내부 풍경을 스케치해 보자면, 한바탕 테스트가 끝나고 여러 팀의 시험관과 응시자가 거의 동시에 우르르 몰려 들어온다. 그리고 시험관들은 바로 자신들의 룸으로 들어 가는데 낙방한 사람은 호명이 빠르고 떨어진 이유를 설명하느라 시험관의 말이 길어진다. 또한 합격된 사람은 컴퓨터에 면허증 발급을 위한 신상 등을 입력 하느라 조금 지체되는 경향이 있고 일단 호명이 되면 사인란에 사인을 하라고 볼펜이 주어진다. 연두색 유니폼 조끼를 입은 시험관들은 다소 사무적이고 무표정 했으나 나름 권위가 엿보였다. 그들은 20여분의 테스트 시간동안 응시자들에게는 절대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주 작은 실수의 경우라 할지라도 점수를 주고 말고는 그들의 재량에 달려 있으므로 사람을 잘 만나는 것도 그날의 운이라 할 수 있겠다. 

아이와 나는 인상이 좋아 보이는 시험관에게 걸리기를 간절히 바랬으나 삐죽삐죽 검은 수염이 면도한지 삼사일은 되어 보이는 듯한 남자에게 불려나가는 순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사람은 결코 겉모습만 보고 평가 할 것이 못된다고 하지만 내 삶의 체험으로 미루어 볼 땐 대체적으로 생긴 이미지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우리말‘꼴값’의 어원이 알고 보면 결코 속된 표현이 아니라고 한다. 

현장에서 느끼는 긴장감은 살이 떨렸다. 아이의 수능 시험 때도 하지 않았던 기도를 했다. 기도라기 보다는 주술같은 중얼거림으로 기다리던 20여분의 시간은 좌불안석이었다. 차가 돌아올 때가 되어 연신 주차장을 내다보니 아직 주차가 능숙치 않은 아이에게는 무리수인 듬성듬성 이 빠진듯한 좁은 공간들만 남아 있었을 때도 마음이 심란했다. 그러나 주차 직전에 이미 채점이 끝난 상태이므로 나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드디어 아이가 바짝 긴장된 모습으로 돌아오고 호명이 빨랐고 칸막이 유리를 사이에 두고 설명이 길었다. 

어쩌나.. 아이의 꿈이 옛날 이야기속 항아리장수가 되어 버렸다. 

항아리를 지게에 지고 장으로 가던 사내가 잠시 쉬어가려 항아리를 내려놓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네. 이것을 팔아 병아리를 사야지, 닭이 되면 내다팔아 돼지를 사야지, 그것을 키워 내다팔아 송아지를 사야지, 송아지가 어미 소가 되고 새끼에 새끼를 치면 부자가 되겠지. 그러면 첩을 보겠지, 본 마누라와 첩이 머리채를 잡고 싸우겠지. 그러면 내가 이렇게 뜯어 말려야지…. 사내의 손에 맞은 항아리가 쨍그랑 작살이나고 꿈이 깨졌다. 어린날 들은 어머니의 이야기에 나는 몹시도 아파했었다. 가련하게도 아이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계획이 무참히 부서졌다. 깨진 상심의 파편 한조각이 내마음에 와 박혔다.  

 와신상담 두번째 시험날이 왔다. 지난밤 꿈에 달리다 멈춰선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좋은 운세를 내어주길 간절히 기도하며 시험장에 도착하니 이번엔 마음이 좋아 보이는 시험관에게 호명이 되었다. 과속이 낙방의 원인이었던 지난번의 실수를 되새기며 침착한 모습으로 시험에 응하는, 단 며칠새에 성숙해진 아이의 모습을 보니 좌절이나 실수가 때론 교만의 브레이크가 되는구나 싶어서 되려 지난번 참패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시험관의 수신호에 따라 좌,우 방향 제시등과 브레이크등을 확인하고 떠나는 차의 꽁무니를 먼길 떠나 보내는 어미의 심정이 되어 바라보았다. 

도로가 밀리는 바람에 종전 보다 십분 정도 늦은 30여분이 지나서 들어오는 아이의 표정이 침울했다. 실수한 것 같다고 지레 낙심하며 실패를 각오하는 듯한 태세를 취한다. 주행 중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과잉 방어 급정지를 한 것이 감점이 될 것 같다며 불안해했다. 꿈에 갑자기 멈춰선 것과 아이의 급정거가 불길하게 연관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를 채점한 시험관은 이름을 바로 부르지않고 무언가 이쪽저쪽을 오가며 업무가 바쁘다. 아이와 나의 가슴속에서 팡파레 직전의 두그 두그 두그 북소리가 주거니 받거니 눈빛으로 감지되었다. 드디어 이름이 불리워지고 볼펜이 주어졌다. 잠시 후 자신의 얼굴이 박힌 P면허를 받아들고 차마 소리치지 못하고 가슴으로 바르르 터뜨리는 환희에 찬 아이에게 찬물 한잔을 권했다.

젊은 청춘에겐 귓등으로 흘려 들을만한 뻔한 충고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 산다는 것 또한 운전과 같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어떤 날은 시종 일관 청색신호 질주에 세상 살만한 것 같고, 어떤 날은 시종일관 황색신호 턱걸이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어떤 날은 시종일관 빨간신호 정지에 안달도 나지만 삶과 운전의 신호등 앞에 순명 해야함을, 질풍노도의 파란 청춘도 빨간불 앞에서는 봐 주기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두려울건 없어 얘야.. 마음의 GPS를 틀고 논길, 밭길, 가시밭 길을 헤치고 네가 점찍은 먼곳을 향해 달려라 하니(Honey).

꼭 어제같은 10년 전의 일이다. 결혼을 앞둔 어깨가 떡 벌어진 아들은 이제 더 이상 어리버리한 아기가 아니다.

이항아(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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