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리를 다녀왔다. 회의 차. 외국이지만 국내용 작은 사이즈 비행기가 떴다. 아마도 이 항공사는 발리를 호주 내의 한 도시로 아는 모양이다. 좁은 공간에 끼어 6시간 반을 날라갔다. 내 여행 버킷 리스트에는 없었으나, 한번은 가봐야 할 곳. 공항에서 20분 거리에 한 기념탑이 있다. 2002년 10월 12일에 일어났던 폭탄사고를 추념한다. 붐비던 두 나이트클럽에서 테러가 발생하여 202명이 세상을 떴다. 그 중 88명이 호주인, 단일 사건 사상자 규모로는 호주 역대 최고다. 캔버라에는 호주인 전사자를 위한 전쟁기념관이 있고, 발리에는 호주인 테러 추모탑이 있다.

끔찍한 사고가 있었음에도 호주인들은 여전히 발리를 사랑한다. 이번 해 1-4월 동안 발리를 찾아간 호주인은 362,874명, 세계 1위다. 참고로 한국인은 10위 59,892명. 특이한 것은 3위 80,000명을 차지한 러시아인들이다. (우크라이나는 9,000명) 관광산업의 말단세포인 Grab 택시 운전자의 말은 좀더 현실적인데, 여행자의 80%가 러시아인이란다. 그만큼 러시아인들이 발리에서 요란스럽게 놀고 있다는 말이다. 워낙 힘든 상황에서 살고 있다 보니 나름 이해는 된다. 반면 호주인들을 두손들어 환영 받는다. 워낙 착하게 흥겹게 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주인들에게 발리는 일종의 해방구다. 택시 값이 호주의 1/5 밖에 안되는 그곳에서 황제 휴가를 누리기 위해 간다.

2.

발리에 가는 내 마음에 두려움은 없었다. 테러가 있었음을 알았지만,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그 생각대로 잘 돌아왔다. 본다이 비치에 가도 구두신고 가서 그냥 오듯이, 발리에서도 발에 물 한번 묻혀 보지 않고 그냥 왔다. 안전에 대한 염려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비슷한 테러가 앞으로도 전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의 기억은 희미해져가도, 발리 추모탑에 기록된 이름들은 여전히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과 글은 중요하다. 과거를 회상하여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를 가늠할 수 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다. 사람은 한 세대를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다. 당대에 겪은 비극을 후대가 되풀이하지 않도록 삶의 기록들을 남긴다. 지상 천국 같은 발리에 가서도, 88명의 이름이 새겨진 비문을 보면 깨달아 진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를.

발리 폭발사고(2002년) 추모탑 희생자 명단
발리 폭발사고(2002년) 추모탑 희생자 명단

3.

난 이 글을 마감에 쫓겨 쓴다. 목요일 새벽이다. 몇 일전 K-드라마를 보다가 맘에 콱 와 닿는 대사를 들었다. “촉을 부르는 주문, 마감’. 지금까지는 ‘마감 시간이 내 글의 원동력’이란 말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 ‘촉, 주문, 마감’이라는 단어들의 조합을 듣는 순간, 내 언어의 공감 능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노트에 기록했고, 여기에 옮겨 썼다. 말과 글의 능력이다. 사람을 살려주고, 새롭게 하며, 발전하게 해주는 것이 글이다. 나의 말은 우주의 하드드라이브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만, 말이 변하여 글이 되면 언제라도 누구라도 뒤져 볼 수 있다. 발리에 직접 가서 88명의 이름들을 찾아볼 수도 있지만, 인터넷으로 뒤지면 아주 쉽다. 그런 기록물들 중에서 신문의 역할은 지대하다. 기원전 3,500년에 기록된 쐐기문자 점토판을 시작으로 현대에 이르는 문자 소식통은 수많은 사람들을 현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난 책을 사랑하고, 신문을 사랑한다. 그 정보들을 내 마음으로 여과하여 이런 글을 쓰면서 내 영혼을 단련시킨다. 오, 사랑하는 한호일보여, 영원하라!

4.

문득 머리를 들어 창문을 바라봤다. 여명의 빛이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색치에 가까운 내가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진홍 빛이 동쪽 지평선을 길게 칠하고 있다. 그 여명 위에는 반쪽 남은 달이 상큼하게 떠 있다. 겨울의 한 중간, 맑고 차가운 새벽이 주는 자연의 향연은 내 영혼을 한껏 고양시킨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야! 내 생각을 정리하여 후대에 남을 글을 쓴다는 것, 이 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복잡한 비행기에 내 몸을 싣고 고달플 필요도 없다. 내가 앉은 작은 책상에서 발리를 품고, 세상과 소통한다. 글의 힘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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