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별은 마음에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나 흔적을 남긴다. 그 이별 중에서도 혈육을 나눈 가족이나 마음을 나누고 지내온 친구와의 이별은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내가 겪은 마지막이 된 배웅은 오랫동안 나에게 텅 빈 세상, 허무한 나락을 경험하게 했다.

70년대 말. 갑자기 찾아온 병마로 아버지는 오른쪽 반신불수에다 언어장애까지 와서 온가족을 충격과 절망에 빠뜨렸다. 뇌졸중이란 단어조차 주위에서 들은 적이 없었던 그 당시 아버지는 57세 젊은 나이였다. 장녀인 나는 결혼해서 동경으로 간지 일년이 되었고 나머지 동생 넷 중에 셋이 학생이었다. 그 후 나는 시드니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어머니는 시집간 딸네 집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가슴에 누르며 13년을 단 하루도 빠짐 없이 아버지 곁을 지켰다. 

중환자실을 거쳐 처음 몇 년 동안은 위독하다는 연락이 오면 나는 비행기를 탔고 내 눈 앞에서 아버지가 경련을 일으키며 온 몸이 멍든 것처럼 보라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된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이 세상을 떠나려고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으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회복시키려고 혼신을 다했다. 수소문하여 한의와 양의를 병행해서 치료에 임했는데 서울 토박이 어머니는 친척이나 지인 한 명 없는 지방 어디어디에 침을 잘 놓는 한의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기가 무섭게 싫다는 아버지를 무시한 채 어떻게 해서든지 모시고 갔다. 그 지성이 하늘에 닿았던가. 언젠가부터 경련이 멈추고 다리의 마비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왼손으로라도 글을 써서 가족과 소통을 하면 좋으련만 의사표시는 왼손의 제스처로 했고 어머니가 유일한 통역사가 되었다. 가족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기 싫어서였을까. 말하기 좋아하던 사람의 입에서 소리가 나질 않으니 아버지는 그렇게 냉가슴을 앓았다. 식사조차도 아내가 곁에서 떠먹여 드렸으니 미안한 마음이 컸으리라. 어머니와 자식들은 아버지가 그런 상태라도 살아 계시기만을 간절히 원했다. 

 아버지는 6남매 중 막내였다. 막내가 갑자기 쓰러지니 위로 두 형님이며 누님들이 애절해 하셨다. 연로하신 큰고모님은 아버지의 병세를 아시면서도 나를 보실 때마다 눈시울을 붉히시며 ‘아빠 어떠시냐’고 물었다. 내 입에서 한가닥이라도 희망적인 말이 나오길 기대하시던 그 애절한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도 막내동생 걱정을 하시던 큰아버지, 둘째아버지 두 분이 70의 벽을 간신히 넘기고 먼저 별세하셔서 아버지가 칠순이 되던 그 해에 나는 혼자서 속으로 긴장 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비록 말을 못하고 오른 손 사용을 할 수는 없지만 혼자서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이발소도 다녀오실 정도가 되었다. 어머니 덕분이었다. 좋아하는 맥주도 한잔 하게 되었다. 안된다고 하면 화를 내는 바람에 좋아지던 병세가 도루묵이 될까봐 드리게 되었다. 식구들은 그런대로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리게 되었을 때 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호주에 모시고 오고자 했다.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시며 ‘나는 아니고 엄마만 모시고 가라’고 왼손으로 말씀하셨다. 동생들도 모두 어머니가 호주에 다녀오시길 원했다. 아버지는 이제 많이 회복하신데다 자기들이 잘 보살펴 드릴 테니 엄마는 아무 걱정 말고 호주에 잘 다녀오시라고 했다. 아아,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기회인가. 그러나 어머니 입장에선 병중에 있는 아버지 곁을 자식들 보다 자신이 지키기를 고집하셨다. 결혼한 딸네 집에 왔다갔다하며 지내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는 어머니는 결국 처음으로 딸네 집엘 다니러 가기로 했다.

호주로 떠나는 날. 온 가족이 김포공항에 모였다. 아버지가 엄마를 배웅하러 공항에 나오셨다는 건 우리 가족 친지에겐 뉴스거리가 되었다. 60일만 헤어져 있다가 다시 반갑게 만날 터이니 서양사람들 같으면 서로 끌어안고 인사를 하건만 우린 그냥 몸을 숙여 절을 하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시드니 집에 와서 어머니와 나는 그 동안 쌓였던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어머니는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시드니 하버의 푸른 물결을 하염없이 쳐다보며‘속이 후련하구나’하셨다. 그러나 운명은 딸과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머니를 그냥 두지 않았다. 호주에 온 지 오십일. 이제 열흘만 있으면 한국으로 돌아갈텐데 한밤중에 남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쌍초상이 날까 두려워 협심증이 있는 어머니에겐 사실을 숨기고 아버지가 병원에 가셨다고만 했다. ‘내가 13년을 하루같이 돌봐드렸는데 내가 없을 때 무슨 일이 나면 절대로 안된다.’고 완강한 어머니의 믿음과 고집. 급히 한국에 도착해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내가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말씀드려야 했을 때의 그 상황을 어찌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으랴.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를 몸부림치며 배웅했다. 50일 전 김포공항에서 아버지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면 가장 힘들었던 배웅이 아니었을까.  

나는 아버지와의 돌이킬 수 없는 사별을, 먼 길을 떠나시는 아버지를 배웅해 드렸다고 표현하고 싶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권영규/수필가, 이효정문학회 (aka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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