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겨울은 제법 겨울 값을 한 듯하다. 추위가 좀 더 일찍 찾아온 탓도 있었겠지만 640 여 미터의 고지대의 외딴 집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진 듯하다. 어서 빨리 따뜻한 봄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 마음 속에서 불쑥불쑥 올라왔다. 7월이 지나가면 봄이 오겠지? 몹시 더울 때면 그래도 난 겨울이 더 좋다며 호들갑을 떨다가 막상 추위가 오래 지속되면 따뜻한 봄을 기다리게 되는 변덕쟁이 중생의 인생살이인 듯하다. 

8월이 되자 아침, 저녁은 좀 쌀쌀해도 낮 기온은 상당히 많이 올라갔다. 이때가 되면 나의 손길은 무척 빨라지게 된다. 무우, 배추, 상추, 옥수수, 호박, 도라지 등등 심을 것이 너무 많아서 이다. 거기에 비해 텃밭이 좀 부족해서 땅을 좀 더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오래 전부터 내 가슴속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곳은 약간 경사지고 여러 해를 거듭하면서 외부 흙을 많이 반입한 곳이라 땅파기가 매우 수월하다. 7월 초순부터 오전 10시쯤 되면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내려간다. 부드러운 흙을 일념으로 파면서 아래쪽으로 밭을 키워 나간다. 땅심이 매우 깊어서 큰 힘이 들지 않는데다가 내 생각대로 더 넓어져 있는 밭을 바라보는 내 마음 속에선 은근한 미소가 나와진다. 희망이 현실화된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되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만족감의 정서적 표출이리라. 

오후 3시 쯤에 다시 나가서 호미질을 하다 보면 텃밭 앞 가로등에 불이 켜질 때까지 일을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루를 마감하는 산중의 호젓한 분위기가 그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땅거미를 드리운다. 뭇 새들이 잘 곳을 찾아 짹짹거리며 날개 짓을 부지런히 하고 개를 앞세워 산책하던 주민들의 발걸음이 한결 더 빨라진다. 멀리 보여지는 산색이 희미하게 보이면서 철거덕 거리며 지나가는 기차 소리도 쉴 때를 기다리는 듯 들려온다. 이럴때 옛 말이 생각난다. 새들이 편안하게 잘 쉬려면 좋은 나무숲을 선택해야 되고 사람이 지혜롭게 살아가려면 현명한 부모와 좋은 친구를 만나야 된다고. 저녁을 먹고나서 잠자리에 누워 오늘 한 일을 생각으로 그려본다. 부드러운 흙으로 평평하게 만들어진 더 넓은 텃밭, 내일은 왼쪽 울타리 쪽으로 그 일을 계속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빨리 내일이 왔으면 하는 마음을 갖으면서 꿀 잠을 청한다.

 흙 또한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굼벵이와 지렁이 등등 수많은 생명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한량없는 종류의 작물들을 길러내어 우리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고 있다. 마치 우리를 낳아서 길러준 어머니의 자애로운 품속이 그를 닮았고 서로서로에게 이익을 나눠주고 받으며 살고 있는 인생살이의 현실이 또한 그와 같다. 그래서 흙이야 말로 생명이며 뭇 생명의 안식처이다. 그러한 큰 음덕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의 일상, 자연과 인간에게 거듭되는 고마움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런데도 우린 왜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불평불안한 생각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지혜롭게 살다 간 고인의 뜻을 한번 새겨보자. 어느 날 먼 곳에서 그분을 만나러 온 도사가 물었다. “어떤 것이 참다운 삶의 모습입니까?”  “평상심이 그것이니라” “어떤 것이 평상심입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고단하면 쉬는 것이니라”  “그런 것은 3살 먹은 애기도 하고 있습니다”  “ 그렇지요,  3살 먹은 애기도 하고 있지만 80이 된 노인도 느껴서 실천하지 못한다오”

자연과 인생을 좀 더 깊이 있게 바라보고 자기 마음 씀씀이에 대한 보다 세밀한 통찰력의 부실함 때문이 아닐까?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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