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나 안
사진: 한나 안

오랜만에 헌 구두를 꺼내어 닦았다. 구두 앞부리 껍질이 벗겨진 부분을 구둣솔 끝에 구두약을 살짝 찍어 바른 후 촘촘하게 박힌 구둣솔로 살살 윤을 내 봤다. 옆면과 뒤꿈치까지 약을 바르고 쓱쓱 문질러가며 광을 냈더니, 뿌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헌 구두가 구름을 헤치고 얼굴을 내미는 햇님 모습이다. 오는 일요일에는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모처럼 정장 차림으로 교회 가야지.

서울에서 살 때는 집을 나서기 전 꼭 하던 일이다. 그때는 신발장에 갈색, 검정, 체리 빛과 흰색 구두를 뚜껑 달린 신발장 안에 가지런히 넣어 두고 신었다. 회사 다니던 때 구두는 항상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어야 했고, 바지 주름은 칼날처럼 서 있어야 했고, 옷과 구두와 핸드백 색을 매치해서 입고 다녔었다.

 

시드니에서 생활하는 요즈음은 메시(Mesh)천으로 만들어진, 운동화 비슷한 검정 신발 한 켤레이면 모든 옷에 통한다. 검소해진 걸까 게을러진 걸까. 바지 역시 겨울철에는 주름이 서지 않아도 되는 레긴스바지이다. 편하기도 할뿐더러 어디를 가던 그런대로 괜찮다.

 

헌 구두가 새 얼굴로 반짝이듯 나이 든 사람의 마음도 반짝이게 하는 약과 솔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겉만을 닦고 광낼 게 아니라 마음도 반짝반짝 광을 낼 수 있는, 그냥 바르고 쓱쓱 문지르기만 하면 활기차고 젊어지는 것 말이다. 마음은 아직도 젊은데 나이가 영 생경하다. 내 나이 칠순이 넘은 게 맞나? 알면서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불로초를 좋아하는 이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구두를 닦듯 구두약을 발라 쓱쓱 문질러 광을 내고 싶어진다. 외출이 점점 싫어지는 것은 집이 아늑하고 좋아서만은 아니다. 친구들의 전화마저도 귀찮아지고 꿈쩍하기 싫어지니, 특별히 제작한 맞춤구두약과 구둣솔이 필요한 게 분명하다. 아침이면 감나무, 살구나무들이 잎을 모두 털고 나목으로 서 있는 뒤뜰에도 가보고, 풀만 무성한 텃밭도 둘러보고, 다육식물 녀석들 형형색색 물든 화분들도 둘러본다. 꽃들의 활짝 핀 모습과는 달리 내 마음은 갈수록 점점 갈대처럼 드러눕고만 싶어진다. 마음을 닦고 광을 내고 싶은데 약과 솔은 어디에 있는 걸까.

 

구두약과 솔을 찾아 바닷가로 나섰다.

본다이 비치에서 브론테 비치까지는 약 1시간 20분 걸렸다. 마주 불어오는 해풍을 점퍼 가득 품고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오월의 물기 어린 바닷바람에 마음속 덕지덕지 낀 먼지를 한 움큼씩 짙푸른 바다에 띄우며 나는 가끔 이 길을 걷는다. 일상의 권태와 나이 듦의 나른함에서 도망칠 수 있는 내 마음의 장소이기도 해서이다.

 

벼랑 위에 우뚝 선 고층 건물 안 카페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통유리창 너머로 지난날들이 꼬리를 물고 눈앞에 나비처럼 나풀거렸다가는 파도가 되어 멀어져 간다. 빗속에서도 걸었고, 뙤약볕 속에서도 걸었다. 때로는 축복처럼 눈이 내린 후의 아침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은 늘 선택의 길 연속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게 최상의 선택이라 여겼는데 지금은 그건 아니었던 거야 해 지기도 한다. 첫사랑이 그렇고, 멀어져간 친구도 그렇고, 결혼도 남편도 그렇다. 그때 이럴 걸 그랬어....... 동굴 속에 숨어든 메아리처럼 외로움이 덩어리 채 만져지는 때면 잃어버린 관계들 상실의 아픔이 스멀거린다. 헌 구두를 닦듯, 구두약을 칠하고 새로 광을 내어 관계를 새롭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유리창에 비치는 시들어진 내 모습은 구두가 낡아졌듯, 무슨 근심이 있냐는 질문을 들을 법한 얼굴이다.

고개를 돌려, 젊음이 있고 생기가 있었던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포도 위를 걷던 때를 퍼 올려본다. 그때가 그리운 요즈음, 마음을 광낼 수 있는 구두약과 구둣솔을 찾아 두리번거려본다.

매일 조금씩 글을 쓰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내 등짝을 밀어붙이는 영혼의 바람 중의 하나이다. 소설 쓰기 강의를 수강한 게 일 년이 넘었다. 환갑을 지난 할미꽃들 모임이다. 아마 그들도 나처럼 지난 삶의 무늬들을 종이 위에 그려보고 싶어서이리라,

 

누가 그랬던가. ‘노년은 생각보다 멋지다, 마음을 비우며 살아가기에 좋은 나이다’ 라고. 담담한 삶의 여백을 가슴에 담으며, 순간 다시 젊어지는 느낌은 구두약이 되고 구둣솔이 되어 새로워지며 상쾌한 기분이 솟는다. 머리를 드높이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나이가 더 들어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 헌 구두를 닦듯 글쓰기를 벗삼아 까부라지려는 나를 하루하루 닦으며 광을 내 보련다.

 

한나 안/수필가, 이효정문학회(aka 시드니한인작가회)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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