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제목은 한국의 요새말로 조중동(朝中東)과 2대 월간지의 칼럼이나 기사에 붙일만한 류다. 여기에서 빠져서 안될 중앙 일간지가 물론 한국일보(韓國日報)다.

왜 한국에서나 읽혀야 할 글을 여기에서 쓰는가? 1세와 1.5세 한인들은 해외에서 살아도 대개 언어와 과거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 고국과 동시에 뜨는 한국어 방송 화면을 듣고 보고 인터넷 기사를 읽는다. 당연히 고국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전평을 평소 많이  한다.

또 상당수는 고국을 위한다며 고국의 정치에 직접 참여하려고 하거나 덩달아 춤추는 걸 보게 된다. 아래 글은 그런 분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이권 카르텔

내가 60년대 중반과 70년대 말까지 한국에서 지켜본 중앙행정 부처와 주요 기관에 자리 잡은 대부분의 기자단에 방송 기자들은 정회원이 될 수 없거나 아예 가입할 수가 없었다.

기자단은 출입 기자들의 자율적 단체로서 그 존재이유는 회원들 간의 취재 협조와 친목이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급료를 주는 언론사를 대표해서 나오는 기자는 당연히 기자실 정회원이 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제약이나 차별 대우가 생긴 이유는 말 안해도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자단의 목적은 앞서 말한대로가 아니고 중요한 다른 알파가  더 있어 그런 것이었다. 밖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여러 형태의 이권이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권력과 대기업을 상대로 필요하면 세게 물어 뜯을 이빨을 가진 몇 개 언론사 기자들 간의 카르텔이 이뤄져야 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방송은 그런 힘이 없었다.

작금의 한국 언론이나 언론인 출신 저명 인사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불미스런 한국 언론의 전통을 빼놓을 수 없으나 이 글의 핵심은 아니다. 

핵심은 한때 푸대접 받던 전파매체의 등극과 그 역기능이다. 그 당시 언론하면 위에서 언급한 활자신문이 주였고 동양방송과 문화방송의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2, 3류 또는 변방 미디어 취급을 받았다. 관영인 KBS 방송은 아무리 보도를 충실히 해도 이빨이 전혀  없는 언론이라서 더 푸대접을 받았었다. 

지금에 와서 상황이 반전 된 것은 60, 7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의 정치는 ‘TV정치’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정치에 대한 텔레비전 (요즘은 유튜브 포함)의 힘이 압도적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여러 사례를 들 필요가 있겠나. 미국에서와 같이 한국에서도 대통령 선거의 귀추가 한 두 번의 주요 출마자 간 텔레비전 대토론의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정치, 사회, 문화, 기타 거의 모두를 미국 것을 따르고 있지만 우리의 정치사회 환경을 생각할 때 TV 정치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많은 토론 프로그램을 미국인들이 쇼(Show)라고 부르듯 이 미디어의 특성 상 그 보도는 내면 보다 겉치레, 실상 보다 허상을 돋보이게 해준다. 

그리고 미디어 수용자의 취향을 냉철한 분석보다 감성 쪽으로 바꾼다. 이런 미디어를 가지고 지금과 같이 혼탁한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정화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대로 말 잘하고 잘 생기고 똑똑하지만 저질인 인물들이 대거  정치계와 관계, 특히 국회에 입성하고 나라를 망치는 사정은  TV치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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