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우드 역에서 나와 조금만 걷다 보면 화개찬이 보인다. 가게로 들어가니 먹음직한 김밥과 당장이라도 흰쌀밥에 곁들여 먹고 싶은 다양한 반찬들이 가지런히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었다. 사장님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손님들은 익숙한 듯이 반찬을 구경하고, 몇 가지를 집어서 계산했다. 

올해 60살의 나이라고 수줍게 말하는 박지영 사장님은 매일 새벽 두시 반에 일어나, 새벽 세시에 공장으로 출근을 한다고 했다. “휴대폰 알람을 밤 11시 10분, 12시, 새벽 1시에 맞춰놔요. 밤새 들어온 주문들을 확인하고 전달해야 하거든요.”

누가 들어도 피곤한 하루의 일과를 피곤하지만, 즐겁다고, 즐거워서 하는 일이라고 인터뷰 내내 이야기 한 박지영 사장님의 열정에 매일 피곤하다고 커피를 들이키는 내가 조금 부끄러웠던 시간이었다

화개찬 박지영 사장님
화개찬 박지영 사장님

호주에 처음 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990년도에 처음 호주에 왔다. 남편은 먼저 호주에 와서 살고 있었고 한국에서 만나 결혼하고 호주로 왔다. 호주에 있는 시댁 식구들이 정말 잘해주셨다. 낮에는 공원에 데리고 나가 주시고, 낚시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늦은 밤 집에 들어오면 눈물이 많이 났다. 고향 생각이 나서였나 보다. 지금와서 생각을 해보면 아마 임신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아이를 낳으니 그 우울한 감정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결혼생활을 하며 아기도 낳았다. 

이스트우드 화개찬 이전에는 식당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1995년도 아시아나 케언즈 취항 첫해에 좋은 계기로 케언즈에서 식당을 크게 오픈하게 되었다. 그 당시 아시아나 취항 덕분에 2년 동안은 손님들이 정말 많이 왔었다. 하지만 여행사와의 협업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성수기, 비성수기가 너무 확실했고, 돈을 많이 벌기는 했지만 손해도 적지 않았다. 고민 끝에 식당 사업을 접고, 시드니로 다시 돌아왔다. 

9살 터울로 둘째가 생겨 육아에 집중하던 차에 지인이 식당을 해보라고 권유를 했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 식당 운영이었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현재 화개찬 바로 옆 상가에서 식당을 시작했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김밥을 좀 만들어서 팔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김밥을 만들기 시작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시식을 권하니 옛날에 소풍갈 때 엄마가 싸준 김밥맛이 난다고 하더라. 

그래서 적극적으로 김밥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주문이 탁상용 달력에 빼곡하게 적히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그러던 중에 ‘식품점에도 납품을 해볼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몇몇 사장님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셨으며 흔쾌히 납품 계약으로 이어졌다.

화개찬의 시작이 ‘김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처음에는 좁은 식당에서 아침 9시부터 직원들이 출근해서 근무하고 저녁 9시에 식당 마감을 했다. 그 이후 저녁 10시부터 김밥 재료를 준비했다. 밤 12시가 되면 또 다른 직원들이 출근해서 김밥을 만들고, 다음날 오전에 퇴근을 하는 루틴으로 일을 했었다. 

그러다가 김밥 주문이 계속 늘어나니 김밥을 만들기 위한 공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식당 바로 옆 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다. 

인수한 가게의 부엌 앞쪽에 공간이 좀 남아서 반찬가게 흉내만 내자 했던 것이 생각보다 잘 되었다. 2014년도 6월에 반찬가게를 오픈했는데, 그 해 10월에 넓은 공장을 오픈하게 되었다. 이전에 운영하던 식당은 접고, 현재는 반찬가게와 공장만 운영하고 있다. 벌써 9년째이다.

하루를 48시간 처럼 사용해야 할 것 같은데, 사장님의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하루 루틴은 새벽 두시 반에 일어나서, 새벽 세시까지 공장으로 출근을 한다. 퇴근시간은 일정하진 않지만 보통 오후 12시에서 3시 사이에 끝이 난다. 낮과 밤이 살짝 바뀌긴 했지만 하루가 일찍 시작된다. 덕분에 운동도 하고 손주들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밤에 일을 하다 보니 좀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시간이 많다고 생각한다. 일찍 시작된 일과로 남들보다는 조금 일찍 취침을 하는 편이다. 새벽의 휴대폰 알람으로 주문 들어온 문자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전달해야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사실 깊은 잠을 자기가 좀 힘들다. 모자란 잠은 주말을 이용해서 자고, 쉬는 편이다.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계속 가게를 운영하는 원동력은 무엇인지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일을 한다. 그래서 계속할 수 있었다. 막냇동생이 화개찬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고, 나는 공장에서 가족,직원들과 함께 일을 하며 보낸다. 아들, 딸, 사위, 그리고 남편이 힘을 보태주고 있다. 가족 6명이 함께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다른 하나는 음식 하는 걸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이랑 외식을 하고 온 날에 식당에서 맛있었던 음식이 있으면 집에서 똑같이 만들어 먹어보곤 한다. 

요리를 자주하다 보니 만들어진 음식을 시댁 식구들에게 대접도 하게 되고,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해 주신다. 소소한 즐거움이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이스트우드 화개찬
이스트우드 화개찬

긴 시간동안 가게를 운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똑같은 음식을 똑같이 해도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기 때문에 모두의 입맛에 맞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어려운 점이라면 어려운 점이다. 

그래도 몇 명의 사람들이 맛없다고 하는 것보다 맛있다고 하는 분들이 대다수라 감사하게 생각한다. 사실 처음 장사할 때는 사람들의 사소한 말에도 엄청 예민하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것들이 무뎌지더라.

단골 손님들도 많이 있을 것 같다. 

단골손님들도 많이 계신다. 심지어 애들레이드에 사시는 단골손님들도 있다. 가끔 달래나 쑥을 가져다주시는 어르신들도 계신다. 음식 장사를 하고 있지만, 맛있는 것이 있다고 챙겨서 가져다주시면 너무 고맙다. 

나도 내가 만든 음식을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때가 행복하다.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손님들도 맛있게 먹으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게 나의 소신이다. 이스트우드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시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강아지 이름이 ‘조지’다. 조지가 화개찬에 들르지 않으면 집에 가지를 않는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잠깐 들어오셔서 인사를 나누고 가신다. 

장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손님들이 많이 사고, 그로 인해 돈을 많이 벌면 당연히 좋다. 그런데 하나를 사더라도 매일 와주시고, 인사해 주시고, 이야기 나눠주시는 것 또한 너무 좋다. 아마 이스트우드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은 다 똑같은 마음 일것이다.

사장님의 꿈은 무엇인가 

항상 머리도, 화장도 예쁘게 하시고 멋지게 차려입으시고 다니시는 할머니 세 분이 계신다. 식당에서 맛있게 점심 식사하시고, 화개찬에서 반찬을 한 가지씩 사가신다. 

내 눈에는 그분들이 너무너무 행복해 보인다. 부럽기도 하다. 어느 날 딸에게 ‘이 다음에 저 할머니들처럼 머리도 하고 화장도 예쁘게 하고서 하루에 한 번씩 동네를 산책하고 싶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딸이 ‘맞아. 저 할머니들 정말 멋지게 사시는 거 같아.’라고 대답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렇게 사는 게 나의 소박한 꿈이기도 하다.

이스트우드 화개찬
이스트우드 화개찬

코로나 팬데믹 때 ‘청년 무료 나눔’을 처음으로 이야기하셨다고 알고있다.

코로나가 터지고, 시티에서 학생들이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노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우리 가게에도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일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젊은 청년들이 위험한 상황에 노출이 됐다는 것은 자식이 있는 입장에서는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이다. 한때는 임금을 주고 고용을 통해, 젊은이들의 노동력으로 장사를 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정작 이런 상황이 왔을 때 어른들이 도움을 주는 게 맞는 일인것 같아 이스트우드 상우회 분들에게 ‘청년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이스트우드에서 나눔을 시작했었다. 상인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고, 다 함께 참여를 하였다. 나는 약간의 불씨를 만들어 줬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식품으로, 물질로 더 많이 나눔하신 분들도 많다.

사장님에게 이스트우드는 어떤 존재인가?

내 나이가 이제 60살이다. 특별하게 뭔가를 확장하는 시기이기보다는 현재를 잘 유지하고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 

노년의 작은 꿈은 건강하게 조용한 곳에 가서 사는 것인데 딸은 ‘엄마는 이스트우드 떠나서 못 살걸?’이라고 말하더라. 아마도 그럴 것 같다. 

작게는 장 보는 것부터 친구들과의 약속도 이스트우드에서 이루어진다. 이스트우드에서 22년을 살았다. 인생의 3분의 1을 이곳에서 산 것이다. 이스트우드는 내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이스트우드가 코리아타운으로 지정 된 이후에 변화들이 느껴지는지

초창기 이스트우드에는 몇 개의 상점밖에 없었다. 이스트우드 한 바퀴를 돌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이 많아져서 너무 좋고, 코리아 타운으로 지정이 된 것에 대해서 이스트우드 상우회 임원들께도 참 감사하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스트우드는 깨끗하고 쾌적하고 치안도 참 좋다고 생각을 한다. 제일 큰 문제인 교통문제 해결과 함께 이스트우드가 더 많이 발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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