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수요일, 영화를 봤다. 몇 주 전부터 눈에 밟히는 영화다. SMH에서도 한 페이지를 들여보라했고, 유튜브에서도 적극 추천하는 영상이 내 알고리즘 속으로 들어왔다. 서양인들이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알고 싶었다. 우리 동네 영화관은 몇 달 째 수리 중이다. 로즈로 갔다. 깨끗했고 컸다. 아침 회의를 마치고 나 홀로 영화관에 들어섰다. 할인 받아 12. 예매할까 했으나, 예약된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냥 가서 내가 원하는 자리 G6를 달라고 했다. 제일 뒷자리에 한 서양인 여성이 느긋하게 그러나 조용히 자신의 세계를 펼쳐 놓고 앉아 있었다. 아마도 한류 팬이겠지. 영화는 두 소년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해성과 나영. 서울 중심가 어느 산동네에 산다. 서로 좋아한다. 그것을 아는 스마트한 엄마들이 둘의 놀이터 데이트를 주선한다. 재미있게 놀고, 학교 가고 하다가 저녁이 되면 서로의 집을 향해 헤어진다. 나영은 더 높은 곳에 있는 집을 향해 돌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남자아이는 왼쪽 길로. 다행인 것은 그 길이 평행이다. ‘기생충영화처럼 밑으로 밑으로 추락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여자아이의 부모는 이민을 결정하고 떠난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나영도 해성과의 이별을 감수한다. 노벨 문학상을 타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

한국에 남은 해성은. 집에서는 엄마가 만들어 준 밥을 먹고, 군대에 가서는 나라가 주는 밥을 먹고, 대학 다니면서는 친구들과 새벽 3시까지 쏘주를 마신다. (그 술친구 중에장기하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진짜 그였다. 명문대 사회학과를 나와, 금수저 출신과는 다르게싸구려 커피를 불러 히트 친 싱어송라이터.) 지극히 평범한 중산층적 삶이다. 멀리 가 봐야 중국 상하이. 나영은 이름을 노라로 바꾼 후 캐나다를 거쳐 뉴욕에 정착한다. 노라는 여성 해방을 다룬입센의 인형의 집주인공 이름이다. 그녀의 꿈은 이제토니 상으로 향한다. 미국 연극/뮤지컬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꿈의 규모가 작아진 것이 아니라, 자기에 맞도록 현실화 시켰다.

12년 동안 서로를 잊지 못하며 살다가, 노라는 글 쓰는 유대계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해성은 여전히 총각이다. 한국 중산층 출신 외아들에게 선뜻 미래를 맡기는 여성이 없다. 그래서인지 옛 친구가 자꾸 보고 싶다. 결국 SNS 덕분에, 뉴욕으로 찾아가 이스트 빌리지 소재 평범하고 작은 유닛에서 살고 있는 노라 부부를 만난다. 매우 어색했고, 심하게 반가웠지만, 서로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정리하고 이별한다. 공항 가는 우버를 기다리는 2, 서로를 깊이 바라본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키스라도 할 기세였지만, 때마침 차는 오고 헤어진다. 마지막 대화를 남기고는.

, 너이기 때문에 떠나야 했어

그래, 널 좋아했던 나의 어린아이는, 20년 전 너에게 두고 왔어. 우리 전생 <Past Lives>엔 뭔가 있었어. 그런데 이번 세계에는 인연이 아니야. 참 궁금하긴 해. 전생에 우린 서로에게 누구였을까? 다음 생에는 우리가 제대로 만나 사랑하고, 결혼할 수 있을까?”

2.

서양인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았다. 현재 호주에서 가장 활발하게 신도 수를 늘려가는 종교(?)는 불교다. 힌두교에서 나온 그들의 핵심 사상은 윤회. 이유는 확실하다. 그들은 지금 사는 이 세상이 맘에 안 드는 거다. 그래서 그들은평행세계 혹은 멀티버스에 환호한다. 다른 생에서는 금수저로 태어나 사는 꿈을 꾼다. 요새 나오는 블록버스터 영화 대부분의 주제다. 이번 해 아카데미 상 7개를 받은 양자경 주연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두 영화들은 독립영화 제작 배급사 <A24>의 작품이다. 유대계 투자회사의 자금으로 설립된 회사로서, 2017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던 <문라이트>, 정이삭이 감독하고 스티븐 연 /한예리 /윤여정이 주연했던 <미나리> 등도 만들었다. 특이한 것은 최근에 한국계들의 작품을 많이 지원한다는 것이고, 여성 작가/감독도 적극 밀어준다. 지금 세상에 한류가 먹힌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실제로 그 안에 현세대를 사로잡는 뭔가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3.

SMH 기사에서는 감히 이 영화를 ‘The best film of the year?’라며, 내년 아카데미 상의 기대감을 높인다. <A24> 작품이니 가능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각본/감독을 맡은 여성인 한국계 캐나다인 Celine Song의 자전적 내용이다.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뉴욕에 정착한 후 드디어 자신의 꿈을 이뤄냈다. 주인공 노라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난 한국에 살던 어릴 때 오줌싸개였고, 처음 이민 와서는 울보였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러질 않아. 내가 운다고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더라.”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는 이민 후 노라의 부모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줄곧 등장하여, 밥해주고, 같이 먹어 주는 해성 부모와는 구별된다. 해성 역을 맡은 유태오는 1970년대 독일로 간 광부/간호사 가정의 아들이다. 퀼른에서 태어나 미국과 영국에서 연기 공부를 한 사람으로, 독어/영어가 유창하지만 영화에서는 어눌한 영어를 구사한다. 노라 역할을 맡은 그레타 리 역시 LA에서 태어난 이민 2세다. 그래서 한국 영화 같지만, 사실은 미국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글을 쓰면서 호주에 정착한 우리네 자녀들을 생각한다. 우리의 선택은 정당했을까? 과연 자녀들에게 지극히 한국적인 것을 남겨 주고 있으면서도, 글로벌 세계 시민으로 키워 내고 있을까? 이민을 결정한 나영 엄마가 해성 엄마에게 하는 말이 내 맘에 콕 박힌다.

버리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거든요!”

김성주 목사(새빛장로교회) holypilla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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