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토로 마을
우토로 마을

무덥고 습한 날씨 속에서 생전 처음 보는 40명의 사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며 4박 5일간의 일정을 소화하는 것은 여간 쉬운일이 아니었지만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후, “후배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라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일본 답사에 임하였고, 과연 이번 답사는 내 인생에 큰 가르침을 선사하였다.

답사 전 내게 ‘대한 독립’이라는 단어는 그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일제 강점기를 지나, 독립적인 국가가 된 것. 그 이하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대한 독립’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슴에 떨림이 있고 원통함, 감사함, 죄송함 등 여러 강렬한 감정들이 내 안에 존재한다.

4박 5일동안 오사카, 교토, 가가, 가나자와, 나가노, 도쿄 6개의 도시에서 스무 곳이 넘는 독립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느낀것도, 배운것도 너무 많지만 이번 기행문에서는 내게 특별히 배움이 깊고 의미가 각별한 4개의 장소를 소개하려고 한다.

첫번째는 우토로마을이다. 한국의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도 나와 대중에게 아주 낯설지는 않은 독립 유적지인 우토로 마을은 차별의 상징이었다. 직업과 주거, 그리고 생활의 여러 방면에서 차별을 받는 재일 조선인들이 함께 모여 인프라를 구성하여 생활한 것이, 사람이 모이고 모여 마을이 구성된 것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중 1941년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위해 일본 정부에 의해 동원된 노동자들도 일본의 패전 후 일본 각지에 남게 되어 우토로 마을에 정착하였다.

윤동주 시비
윤동주 시비

일본의 노골적인 차별과 억압속에도 우토로 마을은 한국인의 포기 하지 않는 기질과 도전정신이 밀집 되어있는 곳이었다. 비록 일본 정부에 의해 억압당하고, 잦은 침수와, 강체 추방 등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들을 숨기는 것이 아닌 자신과 후세의 인권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서 갖은 노력을 다 하며 꿋꿋히 우리 문화와 언어 그리고 자긍심을 지켜나가는 것을 보고 감명 받았다. 우토로 센터 부관장님의 설명에 따르면, 재일동포들은 “일본이 만든 규율을 수용하는 것이 아닌, 옳고 그름을 따지며 이에 맞서 싸웠다”고 한다. 여러 차례의 재판에서 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고 오히려 일본에게 노하며 역정을 내는 우리 민족의 끈기와 정신을 옅볼 수 있는 우토로 마을에서의 시간이었다.

두번째로는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시비이다. 윤동주는 정지용이라는 시인을 존경하였고 그의 시들을 애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존경심과 애정은 윤동주의 시집에 뚜렷하게 보인다. 정지용과 윤동주는 몹시 비슷하였다. 두 시인 모두 기독교인 이었기에, 성경을 기반으로 한 신앙시들을 자주 썼다. 윤동주는 정지용을 따라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하였다. 그리고 1943년 항일운동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순국 이후 윤동주의 유고 30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가 간행되었다. 정지용의 시를 항상 품에 간직했던 윤동주는 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신이 일생동안 썼던 시들을 안고 순국하였다. 평생 정지용을 존경하고 그의 시들을 애정하였던 윤동주는 생전 그를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순국 후 윤동주 시인의 시를 세상에 알린이는 정지용이었다.

이러한 애틋한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첫째로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재능있는 시인이 자신의 국가를 위하여 투쟁한 결과로 순국하였다는 것이 애석하였고 둘째로는, 이리 미래가 촉망한 후배 시인을 죽음 후에 알게 된 스승시인인 정지용의 심정이 너무나 아팠을거 같아 나의 마음 또한 무거워졌다.

윤봉길의사 구금소 자리에 세워진 공용화장실
윤봉길의사 구금소 자리에 세워진 공용화장실

세번째로는 윤봉길 의사의 묘이다. 윤봉길 의사의 집안은 예로부터 유복하였다고 한다. 그의 미래는 밝았고, 넓고 평탄한 길이 그의 앞에 놓여있었다. 그는 일제가 “조선인들이 못사는 이유는 무지하고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말에 농촌을 일으키기 위해 야학과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식민지배에 놓여있었기에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가난과 노예의 삶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대한의 어린이들에게 식민지 노예의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독립 운동의 길로 나섰다가 1932년 일본군인들에 의해 총살 당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택하겠다”라는 어록에서 그의 확고한 의지를 옅볼 수 있다.

시민독립 단체와 윤봉길 의사님의 매장지 위에 꽃과 참배를 하고 묵념하는 시간을 갖는동안, 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윤봉길 의사 라고 하여, 나이가 많을 것 같지만 그는 고작 22살 집을 나와, 24살의 나이에 총살을 당하였다. 나와 한두살 차이밖에 되지 않는 나이의 그가 너무나도 존경스러웠고 그의 죽음이 너무나도 숭고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도쿄 야스쿠니 신사이다. 이곳은 천황과 정부를 위해 전사한 사람들의 영혼을 신으로 모시며 제사지내고 있다. 합사된 사람의 명단만 있을뿐 유골은 없으며 합사과정에 유족의 동의 여부는 고려하지 않았다고한다.

이곳을 가기 전에 나의 마음 가짐은 “일본신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는데, 그냥 구경하고 돌아가야지” 라는 것이었다. 허나, 박물관에 발을 딛고 글을 읽는 순간 일본의 노골적이고도 뻔뻔한 역사왜곡을 보게 되었다. 야스쿠니 신사를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일본의 유명 관광지중 하나인 신사에서 가볍게 구경을 하고 나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신사에 들어가기 전에 가이드께서 우리에게 ‘시민 독립단체’ 라고 쓰여있는 우리 이름표를 빼고, 신사안에서 그룹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독립에 대하여 논하지 말라고 하셨다.

2.8독립선언 기념 자료실
2.8독립선언 기념 자료실

박물관 안에서도 독립에 관한 이야기를 해서도, 독립의 취지를 가지고 들어와서도, 혹은 박물관 안에서 설명을 해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만일, 수상해 보이거나, 한국 독립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이 발칵 된다면 잡혀갈 수도 있다 하였다.

그러나 벽에 쓰여있는 사실이 아닌 정보들을 읽으며 나는 너무나 억울하고 사실을 정정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많이 들었다. 이러한 감정들을 겪으며 어렴풋이 일제 강점기 때의 우리 민족이 겪었을 억울함과 비통함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벽에 쓰여있던 거짓중 가장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던 글귀는 “With the treaty of Shimoneseki, Korea became an independent state, which Japan had long hoped for.”라며 자신들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소망하였다.” 라는 얼토 당토 없는 이야기를 영어로 적어놓았다. 이를 읽는 외국인들과 일본인들은 이것이 사실인 마냥 읽고 넘길 것인데, 지금까지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에 대한 원망이 차올랐다. 역사는 승자들로 인하여 기록되는 것이며, 이것이 역사 왜곡을 낳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의 한국인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대한 호주인이라는 타이틀 안에서 나의 편의를 위해 “이정도 역사 지식이면 충분하다”, ”나는 한국인은 아니니 굳이 독립을 앞서 나설 이유가 있나?“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러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내가 느낀 억울함, 안타까움, 죄송스러움, 울분.. 들은 나의 뿌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확고히 느끼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번 여행을 기점으로 나는 더욱더 정확히 독립에 대하여 배우고 이를 알리고 교육시킬 것이다. 또한 호주 광복회에서 이러한 기회를 허락하여 주셔서 호주 2세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올바른 발자취와 우리 민족의 옳고 그른 역사를 판단 할 수 있는 여력을 키워주신 것에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아직 독립에 대하여 확고한 정의와 의식이 세워지지 않은 호주에 거주하는 한국인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이 기행문을 읽고 조금이나마 마음에 떨림이 있길 간절히 바라며 기행문을 마친다.

김율리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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