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에게는 처음인 유럽을 그룹여행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패키지 여행을 선호하는 그의 뜻을 따랐다. 그는 그룹여행이, 여럿이 우르르 몰려 다녀서 재미있으며 먹고 자는 중대사를 쉽게 해결하고, 어딘가에 종속되면 편하다는 것이다. 그 핑계로 꾀를 내어 나도 아직 밟지 않은 동유럽과 발칸반도 6개국을 12일만에 패스하는 여행을 시작한다. Putin’s  War로 인해, 서울에서 항공로 변경으로 두 시간이 지체되어 열 네 시간후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 플러스 4시간 버스를 타고 바바리아(바이에른)에 이른다.  휴우, 약 18시간에 걸친 거리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간 8시간(시차)을 고려하면 10시간만 걸렸다는, 시간을 번(=돈을 번) 나의 다소 이상한 계산법으로 힘든 몸을 달래었다. 여행의 끝무렵에는 프라하의 유서깊은 성당에 내걸린 현수막의 소리없는 웅변으로 위로 받기도. ‘HANDS OFF UKRAINE, PUTIN!’  

모짜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가 첫 구경지이다.(카라얀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뭘까? 현지 여행가이드가 나타나 ‘얼마나(x2) 빨리(x2) 우리를 몰아 가는지..아, 미칠 뻔 했다. 이런 저런 해설을..이건 뭐 이런 약장수도 없다. 아, 자유여행이 그립다.’(그날 내 일기장에 이렇게 씌어 있다) 알고보니 시간맞춰 해야 할 선택관광 때문에 그렇게 난폭한 진행(?)을 하는 것이었다. 영화 ‘Sound of Music’이 태어난 미라벨 궁전의 정원을 찍고, 잘츠강의 풍경과 다리에서 찰칵, Mo氏의 생가, 세례당, 자주 다녔다던 카페, 초콜렛 가게와 대성당과 돔 광장을 찍었다, 찰칵, 찰칵, 찰칵…. 물론 박물관과 성당 내부 관람은 당연히 생략이다. S와 나는 과감히 선택관광을 취소하고 한 시간의 자유시간을 얻기로 한다. 먼저 모짜르트가 자주 이용했다는 Café Tomaselli(since 1700-)로 가서 멜랑주(mélange)를 주문했다. 알고보니 오스트리아의 커피 멜랑주가 오늘날의 카푸치노 원조라고 하지 않은가. (그후 빈에서 즐긴 비엔나 커피는 아인슈패너einspanner였다) 모짜르트는 뜨거운 커피에 설탕과 생크림을 가득 올린 부드러운 커피를 즐겼을까? 여기서 떠올린 악상은 무엇이었을까?  너무나도 관광객이 붐비는 지금, 그의 감성을 느끼기가 어렵기만 하다. 돔 광장과 미라벨 정원에서 트렙가의 일곱 아이들과 마리아가 부르는 도레미송이 들려오지 않은 것처럼.

차르르 차르르 영사기가 돌아가듯 잘츠부르그를 떠나 할슈타트를 지나고 두번째의 국경을 넘어 발칸반도로 들어간다. 발칸반도의 산천을 가로지르며 나는 니콜라 부비아의 여행기 [세상의 용도]중의 첫째권 ‘아, 봄꽃들이여 무얼 기다리니’를 읽었다. ‘..우리는 일체의 사치를 거부하고 오직 느림이라는 가장 소중한 사치만을 누리기로 작정했다..’ 그는70년전 느림의 미학으로 이곳을 지났다는데, 나는 흐드러진 봄꽃들의 향기를 추억의 밑바닥에 서둘러 파묻으며 고속으로 스쳐간다. 블레드, 중세의 성과 호수, 아흔아홉의 계단을 신부를 안고 올라야 축복받는(?)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는 작은 섬의 예쁜 교회..오늘날에도 동화는 계속된다. 아드리아해의 항구도시 피란(Piran)을 거쳐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 플리트비체에 들어선다. 아침 이른 시각에도 많은 사람이 트레킹에 나섰다. 한국 여행사들의 여행객 합집합이 압도적으로 많다. 고대 로마의 시저(Julius Caeser)처럼 왔노라Veni, 보았노라Vidi, 이겼노라Vici(찍었노라)를 외친다. 카이사르 집합의 원소가 된 나도 찰칵거리며 부지런히 발을 내딛는다. 여러가지의 걷기 코스가 안내되어 있다. 일주일 정도 머물며 저 코스들을 다 밟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당연한 생각을 냉큼 뿌리치고 안광을 부라리며 멋진 경치를 시신경에서 뇌세포와 가슴까지 전달한다. 나는 S의, S는 나의 모델노릇을 일사분란하게 진행하면서 찰칵 찰칵, 두 발은 또 다른 풍광을 겪으려 열심히 움직여야 하노니..많은 일정을 빠르게 진행하는 패키지 여행에 나의 자유와 여유로움이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16개의 천연 계단식 호수를 연결하는 98개의 크고 작은 폭포로 이루어진 이곳..진초록 에메랄드빛 호숫가로 난 통나무 트레킹 코스는 정녕 느림의 미학으로 가야하는 길이 아닐까.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본다. 세포 하나하나에 자연의 에너지를 받아들인다. 그 청량한 우주적 힘이 축적되길 바라며.

여행5일차에 묵었던 보스니아 땅 네움(Neum)의 초저녁 하늘에는, 아마 몇천만km 거리의 초승달과 샛별이 내 육안으로는 100m간격으로 떠 있었다. 가늘고 매혹적인 몸매의 초승달과 빛나는 별이 혜원(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月下情人)의 두 연인처럼 애틋하였다. 그러니 더욱 요염한 달은 삼경에 떠 있는 부분월식의 눈썹달이 아닐까. 이건 정말 순전히 혜원의 그림 탓이다. 아, 예술의 위대함이여! 오백년, 천년, 이천년 전 그들도 같은 달을 바라보며 삶을 살아내어 문화를 문명을 이끌어 왔을 것이다. 이제는 예술이 된  옛날의 도시들을 구경하며 멀리 있는 과거로 갈 때는 예술에 의지해야 함을 깨닫는다. 

 바쁘고 바빴던 이번 여정의 막바지, 하얀 달은 어김없이 차올라 밤 이슥히 독일 시골 마을의 조촐한 호텔 창문 밖으로 내다 보이는 성당의 뾰족한 종탑 위로 반달이 되어 걸려있다.  세상의 봄꽃들이 따사로운 햇살과 달빛의 정기로 꽃망울을 터뜨리는 듯 달은  반원의 달무리를 그리며  천지에 은빛을 뿌린다. 봄이 무르익어 간다. 문득 시드니가 그립다.

김인숙/수필가, 이효정문학회(aka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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