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대한독립만세

도쿄는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독립운동 중심지 중 하나였다. 이는 많은 지식인이 유학을 가기도 했고, 천황이 거하는 곳이기에 독립운동가들이 잠입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의열투쟁을 비롯해 학생운동과 단체 설립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보였다. 

재일본한국 YMCA 회관, 2.8 독립선언 기념자료실 및 기념비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울려 퍼진 ‘독립선언서'는 그 이후 국내외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난 3.1 독립운동의 도화선이자 출발점이라 한다. 일본에 있던 유학생들은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과 파리강화회의, 러시아 혁명 등, 대한의 독립에 유리한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일본제국의 심장부인 도쿄 시내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을 한 것이다. 그날 오전 10시, <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를 조선총독부와 일본 각지 신문사, 잡지사, 여러 학자들에게 우송하고, 오후 2시에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선언서를 낭독했다 한다. 2.8 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최초로 일어난 순수 학생운동이며, 3.1 운동을 촉발한 선구적인 운동이라는 점에서 우리 독립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YMCA 회관 앞 2.8 독립선언 기념비

현재 재일본한국 YMCA 회관 안에는 2.8 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이 있다. 이곳에서 일본에 의한 조선침략부터 2.8 독립선언 준비 과정, 그 이후 독립운동의 확대와 3.1 독립운동까지 생생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조선팔도에서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뇌, 수고와 희생이 있었는지, 비록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지만, 이 기념관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일본 신문에 실린 기생들의 3.1 만세 시위였다. 2.8 독립선언 이후, 전국 각지에서 기생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3.1 운동으로 여성이 거리에 나가서 목소리를 높이고, 시위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 기념관 벽에 붙어 있는 메모 중 정요섭의 ‘한국여성운동사'에는 기생 시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있었다:

“...약 800명의 이 기생들은 화류계 여자라기보다 독립투사였다. 이 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는 불꽃이 튀기고 놀러 오는 조선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사상을 불러일으켰다"

또 의병장 윤희순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중국 땅에서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싸울 것입니다. 저는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천 번을 넘어지면 만 번을 일어서겠습니다. 여자라고 집에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안사람들이 나서야 망해가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있습니다"

벽에 붙은 저 글을 읽었을 때 마음속 꺼진 불씨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 억압받는 와중에도 독립을 외쳤다면, 자유로운 지금은 무엇을 하지 못하겠는가? 21세기가 되었음에도 우리는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잘 알려진 유관순 열사, 김마리아 여사를 제외하고는 아마 이름을 들어본 독립운동가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여성들은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바쳐 독립을 외쳤다. 독립은 이름이 알려진 몇몇 이들이 이룬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모두 간절한 마음을 모아 이룬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투쟁은 몇몇 이들만 기억할 역사가 아니고, 대한 사람인 우리가 모두 기억하고, 이어가야 하는 사명이다. 

도쿄역, 양근환 의사 의거지

이곳이 일본지역에서의 의열투쟁이 시작된 곳이다. 1921년 2월 16일, 양근환 의사는 친일 단체 국민협회 회장 민원식을 “당신은 정말 우리나라를 배반하는 자이다"라며 처단했다. 민원식은 조선인 참정권 운동을 위해 도쿄로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듣기만 하면 나름 민주주의를 위해 애쓴 사람 같은데 왜 암살당했을까? 바로 그 참정권이, 대한이 아니라 일본 참정권이기 때문이다. 일본 국정에 참여하는 것이 일본 국민의 의무임으로, 일본 국민인 조선인도 이에 참여함으로 일본 신민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민원식의 주장이었다. 민원식은 이 일로 총독부의 총애를 받았고 무려 군수의 직책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저 민족의 치욕 그 자체다. 이 같은 친일파가 더욱 창궐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되겠다고 판단해 처단한 것이다. 102년 전, 바로 이곳에서. 그리고 양근환 의사가 민원식을 처단했던 도쿄역 호텔은 지금도 이 자리에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사진 찍기 좋은 관광지일지 몰라도 우리는 이제 안다. 이곳에서 의열투쟁의 신호탄이 울렸다는 것을. 

박열 열사는 우리에게 이미 영화 ‘박열'로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이강훈과 김지섭은 과연 누구일까? 이강훈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고 신민부와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리고 백정기 의사와 함께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계획이 노출되어 결국 체포. 도요타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 후 석방되었다 한다. 

김지섭은 황거에 폭탄을 던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황거 정문에서 폭탄 한 개를 던지고 니주바시 다리 한복판에 폭탄 두 개를 던젔다고 한다. 위 사진의 다리가 니주바시 다리이다. 니주바시 다리를 포함한 황궁 근처에서는 위험 해보이는 물품을 소지해서도 안 되고, 한국어로 큰 소리를 내거나, 도발적인 발언을 해서도 안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목숨을 잃을 것을 알고도 폭탄을 던진 이도 존재하는데, 경찰이 무서워서 한 마디 못하겠는가?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뱉은 ‘대한독립만세'. 이는 나만의 소소한 항일 투쟁이었다. 

사실 김지섭 의사에 대해서는 공개된 정보가 얼마 없다. 이는 김지섭의 폭탄 의거가 천황을 신성시하는 일본에서는 고위층 자리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철저히 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폭탄보다 법정 투쟁으로 유명하다. 법정에서 그는 ‘사형 아니면 무죄'를 주장했다. 이는 일본인 입장을 고려하면 천황을 해하려 했기 때문에 사형감이지만, 조선인 입장으로는 조선을 위한 일이었으니 무죄를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지섭 의사는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20년 형으로 감형되고 이곳, 도요타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현재 도요타마 형무소는 일부분밖에 남아있지 않다. 공사장 너머로 보이는 빨간 벽돌 건물이 바로 도요타마 형무소다. 곧 이곳마저도 허물고 학교가 지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교도소를 허물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학교가 지어진다니, 기분이 묘하다. 

도요타마 형무소와 다르게 이치가야 형무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터에는 주택단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이봉창 의사가 수감되어 있던 곳이자 사형을 당한 장소였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2세였다. 이봉창 또한 천황, 1932년 1월 8일, 쇼와 덴노를 암살하고자 폭탄을 던졌다. 이를 사쿠라다몬 의거라고 부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천황이 사는 궁문인 사쿠라다몬이 아니라, 90미터 떨어진 도쿄 경시청 앞에서 폭탄을 던졌다 한다. 비록 천황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일본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대한이 독립을 위해 힘껏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린 의열투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봉창 의사의 서훈 등급은 2등급이라고 한다. 이유는 천황을 암살하지 못해 의거를 ‘실패'한 것과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기준인지 의문을 가져 본다. 

현재 도쿄 경시청 자리에는 히비야 공회당이 자리 잡고 있다. ‘시민'의 단원들과 함께 공회당 앞을 거쳐 사쿠라다몬 앞을 거닐었다. 과연 이봉창 의사는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의거 후 그의 앞에 있던 일본인을 범인으로 여겨 경관들이 구타하자 이봉창 의사는 안타까움을 느껴 “숨지 않을 테니, 점잖게 다뤄라." 라며 자수했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음. 이것이 대한의 굳은 독립 의지이다.

이치가야 형무소 사형장 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어린이를 위한 놀이터가 지어졌다. 그 큰 부지에서, 놀이터 구석에 자리한 일본 변호사들이 세운 형사자 위령탑이 형무소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징표였다. 그것마저도 막다른 골목에 위치해, 정확히 알고 온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갈 정도의 미미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봉창 의사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투사가 투옥되고 ‘사상범'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곳이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가 되었다니, 과연 아이들은 자신들이 밟고 있는 땅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몇명이나_아십니까?

이강훈, 박열, 김지섭, 이봉창, 그리고 양근환. 나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쳤다. 어디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채. 그중에서 대중에 알려진 이는 소수고, 또 내가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극소수, 내가 제대로 아는 이는 손에 꼽힐 정도였다. 부끄러웠다. 버스에서 저 다섯 애국지사들에 대해 들으면서, 내가 얼마나 조국 역사에 무지했는지 되돌아봤다. 자유를 즐기며 그저 현실에 안주했지,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무엇과 맞바꾼 것인지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늦었다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때라고 했다. 지금이라도 나는 바뀌려 한다. 무지를 벗어나 자랑스러운 독립투사의 후예로.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싫어할 수도 있다. 과거의 일을 왜 굳이 끄집어내서 긁어 부스럼 만드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팩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처가 곪으면 그곳엔 흉이 남는다. 상처가 깊을수록 고통이 크고 오래가고, 흉도 크게 진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생기는 데 몇 초 걸리지 않는 상처도 완벽히 낫는 데는 몇 주가 걸리는데, 하물며 30년에 걸쳐 생긴 상처는 낫는데 얼마나 걸리겠는가? 역사 속 상처와 흉을 돌아보며 더 강해지는 대한이 되길 바란다. 새로운 상처가 나지 않는 단단한 나의 조국이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DAY 5 

#옳고_그름

야스쿠니 신사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들른 날은 전 일본 총리 아베 사망 1주기였다. 그래서인지 야스쿠니 신사의 경비는 삼엄했다. 한국어를 쓰며 단체로 몰려다니는 우리가 수상해 보였던 것인지, 걸어 다니는 곳마다 일본 경찰이 거리를 두며 감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23년에도 이런 취급을 받는데, 과연 100년 전에는 얼마나 더 심했을까? 아마 상상할 수 없이 숨 막히고, 무섭고, 비참했을 것이다. 요즘 야스쿠니 신사는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서 과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고 젊은이의 데이트 장소로 유명하다고 한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는다고 과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데, 일본은 정말 현실 부정과 과거 미화에 능수능란한 것 같다.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 안에 위치한 박물관, 유취관을 돌아봤다. 내부는 상당히 뛰어난 실물 전시로 호소력이 있었다. 지금까지 ‘왜 일본 사람들은 역사를 왜곡해서 알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이 만들어 놓은 전쟁 기념관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설득과 세뇌당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종사가 타고 들이박아서 배를 침몰시키는 개인 어뢰부터, 누르면 흘러나오는 자살 특공대, 가미가제의 유언까지. 실물을 가져다 놓은 듯 생생한 전시물들은 일본의 과오를 반성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침략과 반인륜적 범죄 행위를 정당화하고 찬미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소년 특공대' 전시였다. 이는 15-16살 된 아이들이 대나무 앞에 폭탄을 달아서 배 밑을 찌르고, 자폭하는 부대라고 한다. 실제로 많은 소년병이 잠수에 익숙하지 않아 익사해 죽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국민들을 그저 쓰고 버리는 도구로 취급하는 일본의 모습에, 그리고 그걸 자랑스럽게 전시하는 일본의 당당함에 말을 잃었다. 식민지에 가서 화친하는 그림들을 전시장 곳곳에 걸어놓고, 평화를 위함인 척, 전쟁을 미화하는 것이 상당히 불쾌했다. 

전시를 보며 한 가지 의문점을 품었는데, 영어 번역이 일본의 승리를 자랑하는 글에만 달려있었다는 것이다. 잔인한 전쟁을 묘사하는 글이나, 비인간적인 가미가제는 외국인이 알면 안 되는 사실인가보다. 만약 내가 여길 외국인의 신분으로, 관광객으로 왔다면 나는 그저 일본 전쟁의 영광을 칭송하는 글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교수님들의 일본어 해석이 없었다면, 이런 잔인한 일들은 읽어보지도 못하고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만약 자국민에게 일본의 침략전쟁을 자랑스럽게 전시할 수 있다면, 외국인에게는 왜 보여 주지 못하는가? 

답은 상상에 맡기겠다. 

올해 9월 1일, 이 자리는 국제적으로 언론이 주목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일조 협회 동경도 연합회 회장 미야카와 선생님께 간토 (관동) 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100년 전, 1923년 9월 1일 오전, 강도 7.9의 대지진이 일본 간토를 흔들었다. 하필 태풍성을 가진 저기압에 화재까지, 그저 땅이 흔들림으로 끝난게 아니라 대화재로 엄청난 수십만의 사상자가 생겼다. 그리고 이 참사는 분노를 조선인들에게 돌리기 좋은 구실이었다. 이를 계기로 6000명 이상의 한국인, 700명의 중국인과 수십명의 일본 사회주의자가 군대, 경찰, 자경단에 의해서 학살당했다. 그 때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꾸려 조선인을 마구 죽였다. 상상할 수 없이 잔인한 방법으로. 마치 법과 질서 따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들은 인간이길 포기했다. 놀라운 사실은 어린이들조차도 학살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우물 안에 있는 조선인을 죽이는데 만세를 부르고, ‘우리 동네는 몇 명을 죽였다'라며 자랑하는 글이 난무했다는 사실에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무지가 이처럼 무섭다. 안타까운 사실은 경신참변, 만주대학살을 비롯한 많은 사건 중 제대로 된 사상자 수를 알 수 있는 학살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관동대지진은 후세 다쓰지와 독립신문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대략적인 숫자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미야카와 선생님과 시민모임 ‘독립'
미야카와 선생님과 시민모임 ‘독립'

이 비극을 기억하기 위해 1973년부터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는데, 역대 도지사는 추도의 메세지를 보내왔으나, 2017년부터 핑계를 대며 아무것도 보내지 않고 있다 한다. 미야카와 선생님은 이를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덮으려는 움직임이라고 표현하셨다. 도쿄도지사도 참사가 부끄러운 일이란 것은 아는 모양이다. 또, 이 일이 가슴 아플지라도 잊고 편히 살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올해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100주기라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잊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역사적인 의식을 철저히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100주년은 끝이 아니고, 미래 세대를 위한 출발점이고, 앞으로도 활동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하셨다.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이 우리가 잊고 있는, 혹은 알지 못했던 부조리와 비극에 대해 열정적이란 사실이 감사하고, 또 죄송했다. 

학살의 현장에 도착했다. 100년 전 이곳에서 무차별적으로 ‘개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곳이었다. 파란 하늘, 화창한 날씨와 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지럽히는 풀내음은 아픈 역사는 뒤로 하고 현재를 즐기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곳에선 민간 단체 ‘봉선화' 소속인 소오카 상이 설명을 맡아주셨다. ‘봉선화'는 간토 조선인 대학살에 희생된 조선인을 추모하고,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활동한다고 한다. 깔끔하게 코팅된 자료로 이 더운 날씨에도 땀 흘려가며 이곳에 어떤 참사가 일어났는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셨다. 학살지인 다리 아래 그늘에서 야구하는 부자를 보았다. 과연 이들은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까? 

‘봉선화'는 아라카와 강변에 추모비를 세우려 했지만, 허가가 안 나서 사유지에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작은 건물 안에 증거 사진과 서적들로 빽빽한 ‘봉선화' 사무실을 보았다. 이곳은 정부에서 지원을 받지 못해 자원봉사자와 후원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철도길 바로 옆에 위치해 먼지도 날리고 소음이 심할 텐데, 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 비극 가운데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를 찾았다. 

‘봉선화' 방문을 마지막으로 4박 5일의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이 끝났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각, 백각이 불여일행이라 하지 않던가? 많은 것을 보고 느껴도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엇이 소용이 있을까. 내가 보고 들은 모든 것, 역사의 흔적을 호주 한인 차세대를 비롯한 재호 한인 동포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동의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모퉁이 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를 아는 것은 퀴퀴하고 먼지 묻은 과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인 것이다. 그 뿌리를 찾아 자랑스러운 21세기 독립운동가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숙명이자 과제라고 믿는다. 

이 여정에서 나의 심금을 가장 깊이 울렸던 한 마디로 이 기행문을 마치려 한다. 

대한독립만세! 

이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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