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인 멋글씨가가 주시드니문화원에서 한호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병인 멋글씨가가 주시드니문화원에서 한호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매년 한글날이 되면 두 눈을 반짝이며,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사람이 있다. 강병인 멋글씨가이다. 인터뷰에 앞서 어떤 호칭이 가장 적절한지 물으니 그는 ‘멋글씨가’로 불러달라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멋글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보통 사진가, 미술가라고 많이들 부르지않나. 용어에 대해 설명하자면 전통 서예를 영어로 ‘캘리그라피’라고 번역해서 사용해왔다. 90년대 말부터 서예와 디자인을 접목한 새로운 분야가 생기는데 전통 서예와 어떻게 차별을 할 것인가 고민을 하다가 캘리그라피를 차용해서 썼었다. 그런데 캘리그라피가 예술,디자인 영역이라면 진통 서예는 서양의 캘리그라피와 다르게 작가의 내면세계, 정신을 우선시한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정신과 표현방식을 <캘리그라피>에 담아내기에는 부족하고 전통서예를 답습하는게 아니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시대정신에 맞에 작업을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에 글 서 (書), 예는 우리 말로 ‘멋’을 표현한다. 철학과 정신을 가지고 멋을 내자는 의미를 가지고 서예를 순우리말로 멋글씨라고 표현하고 있다. 국어학자들도 캘리그라피라는 단어를 번역하는것을 어려워하고 있었는데 요즘은 멋글씨라는 단어에 대해 동의하고 사용하고 있다.” 

1962년도에 태어나 멋글씨가로 활동하고 있는 ‘강병인’ 작가. 어린 시절 화가를 꿈꿨던 그는 경남 합천 시골에서 자라났다. 예쁜 선생님이 지도하는 미술반에 들어가고 싶었던 그는 서예반에 들어오면 ‘꿀’을 실컷 먹게해주겠다는 선생님의 유혹에 서예반에 들어가 붓을 잡게 된다. 

“수업시간에 딴 짓을 많이 했다. 책에 낙서를 하고, 그림 그리고. 그런모습을 보시고 서예반에 들어오라고 하셨던 것 같다. 시골에서 다 가정형편이 어렵고 군것질을 못하니 꿀을 먹게해준다는건 어마어마한 유혹이었다. 돌아보면 선생님께서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솔직히 1년 글씨 수업을 한다고 해서 아주 잘 쓸 수 없다. 그런데 선생님이 항상 잘한다, 잘썼다고 해준 그 칭찬이 어린 소년에게 ‘꿈’을 안고 살아가게 해준 것이다.” 고 말하며 선생님의 칭찬이 없었다면 현재의 모습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약속대로 꿀을 많이 드셨냐는 질문에 선생님이 약속을 지키셨다. 꿀도 먹고 군 대회에도 나갔다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강병인 작가. 그는 중학생이 되자 스스로 ‘호’를 지었다. 영묵, 영원히 묵과 함께 하겠다는 결의를 담은 뜻이라고 했다. 

“중학교 2학년땐가, 조선 후기의 금석학자이자 최고의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면서 막연하게 ‘아, 나도 선생님을 닮아 훌륭한 서예가가 되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예 작품을 완성하려면 두 개의 낙관이 필요하다. 하나는 이름 그리고 하나는 호를 반드시 찍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면서 ‘호’를 짓게 되었다.” 

주시드니문화원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주시드니문화원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힘들 때나 어려움이 닥쳐올 때 영묵이라는 호를 붙잡았다는 강병인 멋글씨가. 영원히 먹과 함께 살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또 다지며 오늘날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순수 예술가’를 꿈꾸는 자녀들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소위 밥벌이가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반대를 없었냐는 질문에 그는 집안의 반대는 없었다고 말했다. 

“중학교 때 어머님이 돌아가지고, 중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형제들도 나도 각자도생이었다. 그래서 집안의 반대가 없었다. 혼자 삶을 살아가야 했기때문에 많이 고민하고 갈등했었다. 서예반에서 시작을 했지만 그 이후에는 모두 ‘독학’이었다. 기초를 탄탄하게 배우지 못한 것이 또 하나의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그런게 그것이 나를 키운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더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어떤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상상한 것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서예를 전공으로 배운 분들, 큰 스승 밑에서 배운 분들보다 감히 뛰어나지 않다고 거듭 말하며, 그래서 더 많이 고민하고 공부했다고 말했다. 전업 작가가 되기 전 ‘광고 회사’에서 근무를 했던 이야기가 궁금했다. 지금의 모습은 자유로운 예술가 그 자체여서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디자인을 전공했다. 처음에는 출판사에서 삽화도 그리고 편집 디자인도 했다. 광고회사에 다닐 때에는 기업 로고, 제품 로고, 뿐만 아니라 브랜드 아이덴티티(BI) 작업도 했었다. 광고계의 꽃이라고 불리는 AE라는 역할이 있는데, 광고주와 디자이너 사이에 긴밀한 소통을 요하는 직업이다. 이런 다양한 경험들이 글씨를 쓰는데 ‘자양분’이 되었다.” 

이후 그는 디자인 편집 회사를 차려 운영하던 중 IMF가 터져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하는 우여곡절을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 모든것들을 자양분으로 삼아 2002년 전업작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멋글씨 분야는 처음에 순수 서예와 상업 디자인 서예 두 가지 분야를 나눠서 시작을 했었다. 일본을 갔을 때 간판, 책 제호를 서예로 표현을 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일본은 커머셜 캘리그라피 협회도 있다. 한국,중국,일본 모두 전통 서예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답습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디자인서예를 90년대 초부터 계속 머릿속에 그려왔었다.” 

4-5년의 기나긴 준비 끝에 홈페이지를 만들고 전업 작가로 시작한 수요 없는 시장에서 여지없이 깨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온누리교회 포스터’를 만들게 되어 멋글씨 시장의 물꼬를 틀기 시작했다.

“서예라고 하면 다들 ‘한자’를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한글서예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고 싶었다. 제품로고, 영화 타이틀에 쓰였을 때 한글이 이렇게 표현도 가능하네? 그래, 내가 한번 보여주마 정신으로 (하하) 온누리교회에서 디자인의뢰를 받고 메시지, 표현 전략을 총동원해서 모델과 잘 어우러지게 글씨를 썼다. 만드는 사람도, 의뢰한 사람도 만족하게 되는 광고였다. 그것을 시초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2005년도에는 ‘참이슬’ 글씨를 쓰게 되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강병인 멋글씨가는 공부와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전통서예에 대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계속 되새겼다. 

“추사 김정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이 있다.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으로, 학식과 인품이 향기를 품는다는 뜻이다. 만권의 책을 팔뚝 밑에 묻으라고도 한다. 서예는 단순히 손재주로 할 수 있는 예술이 아니다. 물론 기술도 어마어마하게 중요하지만, 학문과 예술이 하나가 되어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다.”

본인만의 철학과 고뇌, 수 없는 연구로 열라면, 참이슬, 드라마 미생 등 누구나 순식간에 떠올릴 수 있는 멋글씨를 만들어낸 강병인 멋글씨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어디서부터 오느냐 물었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린시절 시골에서 흙을 밟고 산으로 강으로 자유롭게 뛰어놀았던 것이다. 나무를 심고 가을이 되면 추수를 하고, 강에서 고기를 잡고 삶의 모든 것들이 응축되어 있는 시골생활이 너무 좋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글씨를 배우려는 사람에게 ‘숲’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냥 나무같을지라도 그 나무에 수 많은 획이 있다. 노래로 치면 득음이고, 글자로 치면 득획이다. 서예는 가늘고 두껍고 얇고 이런 무수한 획들이 존재한다. 그러니 자연에서 영감을 얻을 수 밖에 없다.”

작품을 그릴 때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에 거창한 철학은 없다. 정성을 다하는 태도만이 있다고 말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글씨를 쓰는 모든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 다 담겨져 있다. 한글이 만들어진 배경,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들 때 가졌던 철학, 하늘과 땅과 사람의 체계로 이루어진 한글제작 원리들이 튼튼한 뒷배경이 되고 있다.”

주시드니한국문화원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강병인 멋글씨가
주시드니한국문화원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강병인 멋글씨가

한글을 이야기할 때 두 눈이 유독 반짝이는 강병인 멋글씨가는 요즘 대한민국 전국 방방곳곳에서 한글을 기념하는 축제의 장이 열려서 기쁘다고 했다. 또 청소년들이 신조어를 만들어서 쓰는 것에 대해 아주 중요하고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어떤 언어학자가 그랬다. 청소년들이 만드는 신조어가 없으면 그 언어는 사라지게 된다고. 신조어를 잘 살펴보면 다 한글로 이루어져있다. 기특하다.(하하) 오히려 한국말을 잊어버리는 어른들이 문제다.” 

시드니에는 한글을 가르치는 한글학교가 있고, 먼저 이민을 온 부모세대들이 자녀들이 한글을 사용하도록 적극적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가 늘 고향을 찾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치는 것은 고유한 정체성을 찾으면서 지키라는 의미가 아니겠나.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손글씨는 아이들에게 창의성을 길러줄 수 있는 대단히 큰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앞으로도 멋글씨를 통해 한글의 멋, 아름다움을 알리는 일을 계속 해나가며 세종께서 한글을 만든 철학 ‘널리 이롭게’ 정신을 가지고 한글로 세상을 더 맑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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