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부터 바다를 지켜왔다는 등대
1879년부터 바다를 지켜왔다는 등대

한국 사람은 물론 동양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 동네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시골에 있는 집이라 대지가 넓고 집도 크다. 혼자 지내기에는 정원 가꾸는 것을 비롯해 할 일이 많다. 따라서 작은 집으로 이사 해야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느 날 우체통에서 발견한 복덕방 전단을 보고 연락해 보았다. 그런데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한 달도 걸리지 않아 집이 팔린 것이다. 

이사 갈 곳을 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캐러밴이 있기 때문이다. 호주를 둘러볼 기회가 주어졌다고 마음을 토닥여 본다. 동네 사람들과 떠들썩한 파티도 두어 번 치렀다. 드디어 동네를 떠나는 날이다. 나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이웃과 인사를 나누며 집을 나선다.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가슴에 와닿는다. 

일단 골드 코스트(Gold Coast)로 향한다. 골드 코스트에 인터넷으로 알아본 집이 있기 때문이다. 오후 늦게 야영장에 도착했다. 이사 준비에 쉴 틈 없었던 몸과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다. 저녁에는 낯선 동네를 걸으며 새로 펼쳐질 삶에 대해 생각도 해본다. 피곤해서일까 아니면 큰일을 끝내서인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은 인터넷으로 알아보았던 집을 보러 나선다. 마음에 든다. 그러나 아직도 공사 중이다. 얼마간 호주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시설 좋은 야영장에서 밀린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보낸다. 여행을 위해 자동차 서비스도 받았다.

까만 바위가 특이한 모양으로 줄지어 있다.
까만 바위가 특이한 모양으로 줄지어 있다.

오늘은 주변 관광에 나서기로 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오락가락한다. 그러나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 걷기에 좋은 날이다. 핑갈 헤드(Fingal Head)라는 곳에 가보기로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바다 깊숙이 길게 뻗어 있는 반도가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목적지로 향한다. 바다를 향해 도도히 흐르는 강(Tweed River)을 건너 핑갈 헤드에 들어섰다. 왼쪽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오른쪽에는 바다가 넘실거리는 1차선 도로다. 차창 밖 풍경을 즐기며 도로가 끝나는 곳까지 들어가 본다. 

도로 끝에 도착하니 작은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끝자락에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 본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올라서니 등대가 있다. 귀엽게 보이는 작은 등대다. 등대 앞에는 1879년에 완공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등대를 지나 바다를 향해 조금 걸으니 예상하지 않았던 풍경이 나온다. 용암이 식어 만들어진 바위다. 오래전 제주도에서 중국 관광객 틈에 끼어 보았던 주상절리가 떠오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붐비지 않는다는 점이다. 명상하는 자세로 바다를 향해 앉아 있는 여인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파도와 씨름하며 바위에서 낚시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을 배경으로 홀로 서 있는 나무.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을 배경으로 홀로 서 있는 나무.

낭떠러지 끝까지 걸어가 검게 타버린 바위를 바라본다. 용암과 바다가 충돌하여 만들어 낸 걸작품, 2,300년 전에 빚은 작품이라고 한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용암이 흘러 바다와 만나는 장면이 떠오른다.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육중한 바위가 물처럼 흘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등대를 중심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걷는다. 넘실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이다. 바다에는 서핑하는 사람들이 많다. 산책로 끝자락에 홀로 서 있는 나무가 인상적이다. 나무 뒤로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 한 폭의 그림이다. 

검은 바위 위에 앉아 하늘과 바다가 마주하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조금 전에 보았던, 명상하는 여인처럼 생각을 내려놓고 들숨과 날숨을 보듬어 보기도 한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 빠져본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가슴을 파고드는 신선한 바람과 함께하고 있는 시간이다, 근심 걱정이 있을 수 없다. 행복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라는 것은 과거 혹은 미래에만 존재하다고 하는 성인의 말이 떠오른다. 현실과 무관한 생각 속에만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크고 작은 도마뱀이 산책로 근처에서 서식하고 있다.
크고 작은 도마뱀이 산책로 근처에서 서식하고 있다.

다음 날은 구름 한 점 없는 무척 더운 날이다. 변덕스러운 날씨다. 수없이 들어온  ‘이상기온’이라는 말이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실감한다. 야영장에서 가까운 해변을 찾아 나섰다. 해변을 따라 운전해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웅장한 탑이 있는 전망대(Point Danger)에 도착했다. 다행히 주차장에 한자리가 비어 있다. 

주위가 한눈에 내려 보이는 전망 좋은 관광지다. 그래서일까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이 많다. 중국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사진사의 지시에 따라 포즈를 취하는 동양인 남녀도 있다. 신혼여행 중인가 보다. 꾸밈없는 해맑은 웃음이 보기에 좋다. 

주위를 걷는데 특이한 주택이 앞을 가린다. 언덕 위에 위치한 우주선처럼 보이는 집이다. 이렇게 특이한 모양의 집을 지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 집에 거주하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올라온다. 사회가 만든 틀에 갇혀 지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흔히 이야기하는 ‘졸부’는 아닐 것이다.

언덕 위에 있는 특이한 건물이 관광객의 시선을 받고 있다.
언덕 위에 있는 특이한 건물이 관광객의 시선을 받고 있다.

전망대를 벗어나 해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걷는다. 백사장은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으로 붐빈다. 산책로 주변에는 크고 작은 도마뱀이 많다. 도마뱀이 길을 가로 막기도 한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도마뱀도 있다. 먹이를 구하는 도마뱀일까,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야생동물이 호주에는 차고 넘친다.

바다 건너 멀리 골드 코스트의 수많은 빌딩이 보인다.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어디서 끝날지 알 수 없는 산책로다. 오래 걸었다. 끝까지 걷는 것을 포기하고 중간에 돌아선다. 반나절을 걸었지만 풍광이 아름다워서일까,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호주의 동해안은 어느 곳을 가도 풍광이 아름다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과 해안을 따라 우거진 산림이 전개된다. 내가 살던 동네도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광을 가지고 있다.

파도를 막아주는 아늑한 백사장. 멀리 골드 코스트 고층 건물들이 보인다.
파도를 막아주는 아늑한 백사장. 멀리 골드 코스트 고층 건물들이 보인다.

하루 더 지나면 이곳을 떠난다. 호주 대륙을 가로질러 남해안으로 갈 계획이다. 내륙으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바다와 푸른 숲은 포기해야 한다. 큰 쇼핑센터도 없을 것이다.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내륙에서만 맛볼 수 있는 다른 풍광이 여행을 살찌울 것이다. 

사람은 한곳에 영원히 안주할 수 없다. 좋은 곳이라도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이야기라도 끝이 있듯이. 

떠남이 있었기에 나에게도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삶을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마주한다.

바다는 서핑을 즐기는 남녀로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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