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소니 알바니지 총리
앤소니 알바니지 총리

호주 원주민을 '호주 최초의 국민'으로 명시하고, 원주민을 대변할 헌법적 자문기구인 '목소리'(이하 보이스)를 설치하기 위한 국민투표가 실패로 끝났다. 개헌안은 호주 국민의 '압도적 반대'에 부딪혔고, 토요일(14일) 투표 마감 이후 불과 몇 시간 만에 부결이 확실시됐다.

헌법 개정에 필요한 이중과반 요건 중 어느 것 하나도 만족하지 못했다. 호주 동부 시간(AEST) 오전 8시 기준, 전국 유권자의 60% 이상이 보이스를 거부했다. 6개 주 중 최소 4개 주의 과반 지지를 확보해야 했던 찬성 캠페인은 어느 주에서도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

모든 주요 여론조사는 투표일을 앞두고 개헌안 부결을 예측했다. 투표 전주에 지지율은 대략 40%대에 머물렀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60%를 넘었던 보이스 지지율이 정반대로 뒤집혔다. 이후 하향 곡선을 타던 지지율은 회복 기회를 잡지 못했다. 실제 투표 결과는 여론조사보다도 나빴다.

토요일 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앤소니 알바니지 총리는 "호주의 역사가 65,000년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며 여전히 사실로 남아 있다"면서 "내일부터 우리는 위대한 호주 역사의 다음 장을 함께 써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투표로 호주는 식민지 역사를 가진 국가 중에서 원주민을 인정하지 않는 헌법을 보유한 국가로 남아있게 됐다. 호주에서 화해(reconciliation)와 인정(recognition)을 진전시키려고 애써왔던 원주민 단체의 활동에도 어느 정도 타격은 불가피하다.

원주민 지도자들은 일주일 동안 침묵의 시간을 갖겠다고 밝혔다. '예스23(Yes23)' 활동가 레이철 퍼킨스(Rachel Perkins)는 소셜미디어에 국민투표를 지지한 호주 원주민들의 성명을 공개했다.

이 성명은 고작 235년 동안 이 대륙에 산 사람들이 6만 년 동안 이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씁쓸한 아이러니"라고 지적했다. 원주민 활동가들은 "지금은 이 비극적인 결과에 대한 원인을 분석할 때가 아니라 침묵을 지키며 애도하고 이 결과가 초래하는 일들을 깊이 생각해야 할 때"라고 대응했다.

알바니지 정부엔 호주 원주민과 비원주민 간의 격차를 해소할 새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과제가 생겼다. 어쨌든 현실은 호주 원주민의 기대 수명은 비원주민 대비 8년 짧고, 자살률은 전국 평균의 두 배에 달하며, 교육∙건강도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한 원주민 자문기구는 법률로 마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이스 찬성 캠페인은 헌법에 보이스 조항을 명시하여, 다른 정부가 임의로 이 기구를 폐지할 수 없게 만들기 원했다. 

높았던 보이스 지지율에 힘이 풀린 이유는 복합적이다. 일차적으로 노동당 정부에 악재로 작용했던 것은 '경제'다. 고물가, 고금리 압력에 따른 생계비 위기는 정부의 핵심 경제 현안이다. 총리도 호주인의 우선 관심은 국민투표보다는 먹고사는 문제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노동당이 찬성 캠페인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유권자에게는 마치 정부가 다른 국가 현안보다 국민투표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부 정보 부족론'과 '국가 분열론'을 꺼내든 반대 캠페인의 전략이 유효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국민투표 질문은 일부러 모호하게 작성됐다. 헌법의 특성을 고려한 개헌안은 보이스의 구성, 기능, 권한, 절차 등을 의회 입법에 맡기고자 했다. 찬성 진영에서 이 부분을 강조하는 한편 정부는 400쪽 분량의 보이스 공동 설계 보고서를 준비했다. 하지만 야당과 반대 진영의 "모르면 반대표를 던지라" 슬로건은 유권자의 불안감을 건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보이스가 원주민에게 특권을 부여해 국가를 인종적으로 분열시킬 것이라는 주장은 반대파에게 강력했다. 리졸브 정치 모니터(이하 리졸브)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보이스 반대 유권자의 33%가 이를 가장 설득력 있는 반대 논거로 꼽았다. 반대 캠페인은 호주 식민 역사, 원주민의 특별한 지위에 관한 문제를 인종과 권리 문제로 바꿨다. 소위 '갈라치기'로도 풀이할 수 있는 이 전략이 먹혀들었다. 

알바니지 총리는 지난 토요일 연설에서 "오늘 밤의 결과가 기대했던 결과는 아니지만 호주 국민의 결정과 이를 이끌어 낸 민주적 절차를 전적으로 존중한다"며 이제는 화해를 위한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최근 분열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진짜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자"면서 '진짜 분열'은 원주민과 비원주민 간의 격차라고 강조했다.

이어 총리는 "이번 의견 불일치의 순간은 우리를 정의하지도 분열시키지도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는 "우리는 찬성 유권자도, 반대 유권자도 아닌 호주인"이라며 "우리는 왜 이 논쟁을 시작했는지 잊지 않고 이 논쟁을 함께 넘어서서 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날 더튼 대표는 "이번 국민투표는 할 필요가 없었던 투표였고, 부결은 호주를 위한 올바른 결과였다"고 밝혔다. 원주민 성 학대 로열커미션 조사, 생활비・주택 구입 지원 등 원주민 지원금 감사 등을 추진하겠다고도 했다.

월요일(16일) 오전, 더튼 대표는 재집권에 성공하면 원주민 인정을 위한 두 번째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사실상 철회했다. 그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호주 국민은 아마도 국민투표 절차를 한동안 국민투표 절차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리졸브 조사에서 유권자의 58%는 보이스와는 별개로 원주민을 최초의 국민으로 인정하는 개헌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시점에도 원주민에 대한 헌법적 인정은 여전히 살아있는 의제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2차 국민투표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정치권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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